H2의 선택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가끔은 이야기가 떠올라 잠이 오지 않을 때가 있다.
글은 그런 순간에 잘 써지게 마련인데, 나의 경우 깊은 밤이 그렇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시간은 나처럼 면역질환이 있는 사람에겐 수면을 통해 몸의 회복을 도와야 하는 중요한 타이밍이기도 하다.
어절 수 없이 다시 이불속으로 나를 집어넣고 억지로 잠을 청할 때가 많다.
거의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내가 떠올렸던 기억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마는 안타까운 현실과 마주한다.
다행히 어젯밤에 떠오른 생각은 오늘 아침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아침이 되면 아주 보잘것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늘은 그 보잘것없는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우리 동네에는 나와 동갑 친구 중, HHJ이라는 이니셜을 가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를 H2로 불러보려고 한다.
H2는 나에게 좋은 친구였다. 지금도 떠올려 보면, 커다란 눈에 까만 눈동자를 가진 아주 착하고 예쁘게 생긴 친구였다. 비록 지금은 연락이 끊기고, 이사도 갔지만 이상하게 웃는 얼굴은 눈에 선하다.
그 친구와 가끔 학교를 갔는데, 우리는 매일 아침 학교로 가는 골목길의 좌우 끝쪽을 살피며 가곤 했다.
아주 드문 일이지만, 아이들이 뛰어다니다가 흘린 동전이 눈에 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길은 꽤 많은 학생들이 꼭 지나가야 하는 길목인 동시에 학교 앞 작은 문방구 겸 과자 가게로 통하는 길이기도 했다.
사실 매일 허탕이었지만, 그날 우리는 성과를 거두고 말았다.
백 원을 주운 것이다. 주운 것이 나였는지, H2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린 그 백 원으로 공정하게 반씩 가게에 가서 자신이 원하는 걸 사기로 정했다.
그 친구는 주저함 없이 50원어치 과자를 골랐고, 나는 50원짜리 연필 한 자루를 샀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그 친구보다 더 실속 있으면서도 좋은 선택이라고 믿었다.
그 시절에는 1원짜리 과자도 있었기 때문에 그 친구는 나름 꽤 많은 과자를 살 수 있었다.
나는 내심 부러웠지만, 나의 선택이 현명한 것이라 믿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필통에 있는 시커먼 커버의 문방용 칼로 연필을 깎았다.
그런데 심을 날카롭게 다듬을 무렵, 허망하게 연필심 4센티 정도가 쑥 빠져 버렸다.
나는 다시 연필을 깎았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반복되면서 연필은 결국 몽당 연필이 되어 버렸다.
연필심이 충격으로 인해 곯아 있었던 것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나머지 아주 작은 연필을 쓰레기통에 버리면서 나는 나의 선택이 현명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연필만 깎느라 손만 아팠을 뿐이었다.
그 순간 H2의 선택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난 그러한 사실을 H2에게 말했는지 기익이 나진 않지만, 그날 이후로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그 기억은 내 몸에 각인되어 길가에 떨어진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판단을 세우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만약, 누군가의 신원과 관련된 분실물이라면, 우체통이나 해당 장소에 물건을 인계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면 지나치기로 마음먹었다.
20대 후반, 아침에 직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걸어가는 길 가로수에 만원 짜리 다섯 장이 떨어져 있는 현실과 맞닥뜨렸다. 순간, 나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그 돈을 못 본 것처럼 그냥 지나쳤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 자신이 그 돈을 잃어버린 것을 자각하는 순간, 자신이 걸어왔던 길을 분명히 되돌아와 그 돈과 마주할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물론 그 길을 오가는 모든 사람이 남의 돈을 가지려는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말이다. 태평성대에는 백성이 모두 정직해서 길에 떨어진 것을 줍지 않았다는 '도불습유'를 내 나름대로 실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남의 것은 결코 내게 이롭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그날 집으로 되돌아오는 길가에 분명 그 돈은 사라지고 없었다는 사실이다.
돈을 벌기 위해 매일 일을 나가고, 직장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 돈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인데 그 돈이 사람들의 삶의 흐름을 바꾸는 힘을 가져 버렸다. 어찌 보면, 종이에 불과한 돈이 때로는 사람의 목숨을 쥐고 있다는 것이 무섭고 가슴 아프다. 그러면서도 나 또한 매일 아침 알람을 해 놓고, 정해진 시간에 일을 나간다. 그리고 한 달 치의 월급을 받고, 아이들을 키우고 생활을 해내간다.
그래도 가끔 생각한다. 돈의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속성에 대해서.
그리고 돈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또 다른 계산법으로 우리 삶에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40년도 더 지난 그 시절, 내 몫이라고 생각했던 50원의 가치가 분명 내 것이 아니었음을 자신의 몸을 던져 내게 가르쳐 주기 위해 애썼을 연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