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던 비가 잠시 멈추고 햇살이 뜨겁다. 이런 날이면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진다. 할 일은 많은 것 같은데 막상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사실 예전부터 알았던 사실이지만, 나에겐 약간의 일중독 증세가 있다. 무언가 하지 않으면 불안한 생각이 든다.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 시간이 낭비되지 않는 느낌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항상 아침 6시면 일어나 아버지께서 써 주신 한글을 공부하곤 했다. 5~6살 무렵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던 나는 이미 아버지가 적어 주신 한글을 다 떼고 한자까지 써 내려갔다.
입학해서 내 이름 쓰는 곳에 한자를 적으면서 조금은 의기양양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무언가를 하면 나 도 모르게 뿌듯함이 생겼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약간의 인정 욕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를 향한 인정욕구보다는 나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충족되지 않아서 더 노력했던 것 같다.
중학교 시절부터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서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는데, 한 번은 내 인내심을 테스트하기 위해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빵과 우유만 싸가지고 가서 그 자리에서 점심을 해결하면서 내가 최장 앉아 있는 시간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 청소년기를 지나 대학교에 가서도 일과 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었다. 물론 과소모임도 했지만, 그 외에는 도서관에서 지냈던 기억이 대부분이다. 충분히 즐기고 편히 쉬어도 되는 시절에 왜 그렇게 공부에 얽매였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교사가 되었지만, 나는 어느새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그 긴 세월을 그렇게 지내다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시간을 낭비하는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9년 전 갑상선암을 앓고 나서 인생의 쉼표라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생각하고자 노력했으나, 학교 일도 바쁜데 집밥을 그리 열심히 하고, 심지어 된장까지 담가가면서 나를 혹사시켰다.
이렇게 류마티스 관절염을 앓고 나니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을 되돌리려고 하니 이미 늦어버린 느낌이 들어 스스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삶의 항로를 진짜 바꿔야겠다고 생각한다. 게으름도 부리고 내 손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마음가짐에서도 벗어나고 누군가의 인생을 위해 지나치게 애쓰지 말 것이며, 안 되는 일에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아야 한다. 내 몸이 이미 너무 아프다고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후회하고, 아쉬워하면서 또 다시 나에게 상처 주는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들이 지금의 나에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나간 시간이 후회될 때면 지나치게 고민하지 말고,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잠이나 청해야겠다. 나에게 진짜 휴가를 주어야 할 것 같다.
그저 바람이 불면 바람을 느끼고, 따뜻한 햇살에 위로받으며 개구리 울음소리에 장단 맞춰 그저 웃어보려고 한다. 내 인생을 가벼운 멜로디에 싣고 무겁지 않게 살아보려고 한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책들을 실컷 읽으면서 나를 다져가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고 조금은 지저분한 것들을 넘겨가면서 지친 나를 위로하는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래야 내가 다시 제대로 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