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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Aug 23. 2022

놀이터의 미스터리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61일째

8월 23일(화) 오전엔 선선, 오후엔 늦더위


오늘은 내가 새벽 수유 담당이었다. 둘째는 어젯밤 9시에 잠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났다. 사실 내가 새벽 3시까지 잠들지 못해, 상태가 안 좋을 때마다 잠자리를 봐주었기에 둘째가 더 늦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새벽 3시에 다시 분유를 먹인 뒤 역류방지쿠션에 눕혀 침대 내 옆자리에서 재웠다. 나의 콧김을 마구 뿜어 둘째를 혼미하게 만든 뒤 재웠더니 아침 8시까지 바로 그 자리에서 잘 잤다.


아침 8시에 바로 아침 수유를 하고, 둘째와 일어났다. 첫째는 아빠와 유치원 갈 채비를 마치고 잘 갔다. 난 둘째 낮잠 시간에 맞춰 같이 눈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둘째는 오늘따라 좀처럼 푹 자지 못했다. 내 상태가 영 메롱이라, 남편이 오전에 어떻게 집을 나갔는지 알아채릴 새도 없이 오전 시간이 지났다.


그렇게 정오를 맞이하자니 너무 무기력하고 축축 처졌다. 이러다간 하루를 망칠 것 같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우선 밥부터 먹었다. 그때까지도 바이오리듬이 살아나지 않아 남편과 한마디 말도 없이 밥만 먹었다. 빨리 바깥바람을 쐬어야 할 것 같아, 서둘러 둘째를 남편에게 맡기고 동네 마실을 나왔다.


내 마실 코스는 동네 도서관 그리고 다이소였다. 도서관엔 첫째 책을 빌리러 왔다. 첫째가 보고 싶어 했던 <공룡유치원>과 최근 재밌게 읽었던 <비룡소 그림동화> 시리즈를 빌렸다. 그리고 다이소로 향했다. 몇 가지 생필품을 사고 유아 코너에서 첫째가 좋아하는 <슈퍼윙스> 퍼즐과 미로 찾기 책을 샀다. <슈퍼윙스> 퍼즐은 만기를 맞이한 첫째의 칭찬스티커에 대한 선물로 준비했다.


집에 돌아와 남편과 복숭아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냅을 할까 싶었지만 외출로 기분이 좋아져 기세를 몰아 홈스트레칭을 했다. 7분짜리 한 개와 14분짜리 한 개. 도합 21분 정도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기분이 산뜻해져 첫째 하원도 내가 하기로 했다. 마침 산부인과에서 피검사 문자가 왔는데, 비타민D가 부족하다는 결과여서 햇빛도 많이 쬐어야 했다.


유치원 하원 버스에서 내린 첫째와 바로 동네 놀이터로 갔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아이들이 바로 오지는 않고, 30분 정도가 지난 다음부터 한 두 명씩 오기 시작했다. 네 살 틈바구니에서 지루해하던 첫째는 다행히 다섯 살 남자 친구들이 놀이터에 오자 신나게 씽씽이를 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가장 같이 놀고 싶은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하자 첫째는 금방 김이 빠진 눈치였다. 그 친구와 같이 놀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다른 친구들 모두와 같이 놀고 싶진 않은 첫째는 계속 한 자리에 앉아 징징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친구를 다른 누구와도 놀지 못하게 하고 우리 첫째와만 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놀이터 안 풍요 속의 빈곤은 시작됐다.


원래 첫째는 놀이터에서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놀이터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지낸다. 그런데 최근 들어 내가 하원을 담당하는 날들이 생기면서 갑작스레 떼를 쓰거나 잘 놀던 친구들과도 놀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며 말도 안 되는 생트집을 하는 일이 생겼다. 난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지 첫째에게 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아이들과 활발하게 어울리지 못하고 사소한 일로 금방 토라져 허송세월만 하다 집에 들어오는 첫째가 안타까울 뿐이다.


나의 안타까움은 첫째의 생트집과 시너지를 일으켜 결국 첫째에게 협박성 훈육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감정이 섞인 훈육을 첫째에게 하고 만 것이다. 아이 마음을 알아주고 다독여주며 감정을 배제하여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난 자포자기한 채로 아무래도 엄마랑 오래 같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며, 그럴 바엔 앞으로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줄이는 게 더 낫겠다고 말해버렸다.


첫째는 그런 말을 듣고서도 속마음을 굳이 나에게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내일은 놀이터에 가지 않겠다고, 심심하고 재미없으니 집에 와 엄마와 놀겠다고 말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하렴. 나 역시 그렇게 대답해 버렸다. 차라리 남편이랑 하원하고, 남편이 바깥 놀이를 하게 하는 편이 첫째에게 훨씬 나은 것 같다. 내가 첫째 곁에 있는 게 첫째의 사회생활에 한 톨 도움되지 않는 것 같아, 오늘 나의 긍정적인 에너지가 놀이터에서 모두 소진돼 버렸다.


나와 둘만 있음 말도 잘 듣고 똘똘한데 왜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만 되면 생트집에 몸은 오징어처럼 배배 꼬거나 땅바닥에 엎드리는 등 이해 안 되는 행동들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 스트레스인 것인지 아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엄마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미스터리다.


그렇게 저녁 내내 나는 첫째에게 적대심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자고 싶다는 첫째와 잠자리 대화를 하며 느낀 것은 오늘 내가 놀이터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만큼 첫째가 그 일로 타격을 받진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아까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계속 이야기를 꺼내고 대안을 얘기하려 하지만 첫째는 별 대수롭지 않게 그냥 오늘은 재미없었다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존에 늘 해오던 놀이나 장난감이 점점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 첫째의 놀이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이것저것 알아보겠지만 놀이터 사회에서 우리 첫째가 더 흥미를 많이 느끼도록 하려면 나 혼자 만의 힘으론 부족할 것 같다. 아무래도 남편에게 SOS를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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