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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09. 2022

한가위만 같아라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78일째

9월 9일 금요일 따사로운 가을날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휴직을 하니까 왜 가정주부들이 명절을 싫어하는지 이해가 된다. 만약 외벌이 가정이라면 평소에는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를 어딘가 등원시키고 집에 아무도 없을 시간에 명절에는 죄다 집에 있다. 여기에 양가 부모님 찾아뵙는 것도 다 일이고 명절 음식 준비도 해야 하고 선물이나 용돈도 챙겨야 할 것 같고 여러모로 평소보다 손이 많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몸과 마음이 다 바쁘고 피곤한 날이다. 그냥 회사나 학교 안 가는 것만으로도 마냥 좋았던 명절이 누군가에게는 왜 이렇게 스트레스인지는 알만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예외다. 일단 우리 부부는 원래는 맞벌이고 지금은 같이 휴직을 하다 보니 명절에 대한 태도가 서로 동일하다.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은 다 근처에 사신다. 우리 부모님 댁은 차로 30분 거리에 있고, 처가댁은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다. 누구 집에 먼저 가냐 마냐 따질 이유조차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리 부모님은 기독교인이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추석이나 설이나 차례상 준비라든가 전 부치고 제사 음식 준비 자체를 생각조차 안 해도 된다. 명절 외에 다른 제사도 없다. 이럴 땐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는 게 좋다.


그래서 결혼 후에 우리 부부에게 명절이란 아주 꿀맛 같은 휴가이자 연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이번에는 휴직 중이므로 원래 회사는 안 가는데 연휴라 첫째가 유치원을 가지 않고, 여기에 100일도 안 된 둘째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려니까 평소보다는 번거로운 것들이 많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하루였다.


우선 첫째가 등원을 안 하는 만큼 우리 가족은 모두 여유롭게 아침을 맞이했다. 눈곱도 안 뗀 애를 마구 깨워서 대충 아침을 먹이고 얼굴에 물칠을 하고 대충 양치질을 시켜서 옷을 빨리 입으라고 10번 정도 다그친 뒤에 마스크와 안경을 씌우면서 9시에 헐레벌떡 뛰어나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대신 10시까지 아차산에 가기로 했는데 애 둘을 데리고 가려니까 생각보다 늦어졌다. 그래도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시간이 몇 분 지난다고 아차산이 유치원 버스처럼 먼저 떠나가지는 않으니까. 장인 장모님을 아차산에서 만나서 함께 데크길을 걷는 사이 둘째는 계속 잠만 잤다. 차만 타면 자고 아기띠에 안고 다녀도 잔다. 며칠 전에 올림픽공원 갔을 때 못 보여준 숲과 나무를 보여주고 싶었는데 또 실패했다.


대신 첫째는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니면서 둘레길을 돌았다. 걷다가 금방 힘들다고 하지도 않았고, 18-21이 마이너스 3이라는 걸 이해하는 영특함도 뽐냈다. 산에 갔다가 들른 장난감 가게에서는 원하는 장난감이 없었음에도 인터넷으로 사기로 하고 한 마디 떼도 쓰지 않고 아무것도 안 사고 순순히 나오기도 했다.


오후에는 적절한 자유시간과 추석에 걸맞은 화목한 시간을 보냈다. 우선 처가댁에서 둘째가 자고 첫째는 혼자 잘 노는 틈에 집에 와서 밀린 유튜브 제작과 집안일을 모조리 해치웠다. 유튜브에 대략 1년 전쯤 올린 영상 하나가 떡상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세탁기를 기다리면서 꿀맛 같은 황금빛 낮잠도 잤다. 그러는 사이 내가 응원하는 LG트윈스도 역전승을 거뒀다.


선물 보따리를 3개나 들고 처가댁으로 돌아갔더니 형님네 식구들이 와 있었다. 어른들도 많고 중학생 초등학생 언니 오빠들도 있어서인지 우리 애들도 집에서보다 순하고 말도 잘 들었다. LA갈비를 뜯으면서 이런저런 근황을 나누고 막걸리도 한잔 걸쳤다. 아무래도 명절에 양가 부모님 댁에 가면 손님인 우리가 밥을 차리지는 않는다. 특히 처가댁에서는 사위인 내가 음식이나 설거지를 한다고 하면 오히려 다들 불편해한다. 역시 사위는 아직 '백년손님'인가 보다. 사실 둘째를 내가 안고 있으면 아무도 나한테 뭘 시킬 일은 없다. 그래서 명절에는 오히려 삼시세끼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하는 집안일은 평소보다 덜하니까 편한 면이 있다.


오후 내내 순하기만 하던 둘째가 칭얼대기 시작해서 얼른 아기띠에 태우고 짐을 챙겨서 나왔다. 장인어른이나 형님은 사실 아기를 나만큼 잘 못 본다. 물론 요즘 시대가 달라져서 내 친구나 지인들 중에는 나처럼 아기를 잘 돌보는 아빠들이 꽤 많다. 그래도 어쨌거나 장모님이나 처남댁이 보기엔 상대적으로 내가 썩 괜찮은 아빠일 거라는 생각이 조금 들어서 어깨가 들썩거렸다.


이제 내일은 우리 부모님 댁에 간다. 아침에 갔다가 애들이 다 돌아오는 차에서 곯아떨어질만한 시간에 집으로 와서 아내와 추석 특선 영화를 보는 것이 목표다. 물론 TV에서 틀어주는 걸 보는 건 아니고 후보작을 오늘 미리 골라놨다. 내일도 오늘만 같아라. 매일매일 한가위만 같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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