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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10. 2022

달님, 제 소원을 들어주세요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79일째 

9월 10일(토) 늦여름 같은 초가을 


한가위다. 연휴다. 추석 명절은 나에겐 연휴와 같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친정과 시댁이 있다. 결혼을 함으로써 일 년에 열 번씩 제사를 지내던 우리 친정의 친척모임에서 해방됐다. (물론 제사를 지낸다고 내가 한 역할은 별로 없었다. 엄마는 늘 혼자서 음식 준비를 다 해두시는 편이었고 난 이기적인 딸이었다.) 


결혼 후 명절 땐 친정과 시댁에 하루 정도씩 기분 좋게 나들이 삼아 다녀온다. 친정은 늘 사랑이지만 내겐 시댁도 늘 사랑이다. 어머님이 해주신 맛난 밥을 먹고 첫째와 잘 놀아주시는 아버님이 애를 데리고 나가주시면 늘어지게 낮잠을 잔다. 시댁에서 하루 자고 오는 날도 다르지 않다. 시부모님은 늦잠 자는 우리 부부를 위해 아이만 쏙 데리고 나가주신다. 남편과 푹 자고 일어나면 식탁엔 고구마와 토스트 등 가벼운 아침이 있어 마치 게스트 하우스처럼 아침을 먹은 뒤 또 재미나게 놀다 오면 된다. 밥때마다 식사 차리시는 어머님 대신 가끔 설거지만 한두 번 한다. 맛있는 밥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다. 


약간 부담스러운 점은 가족 예배를 보는 것인데, 이것 또한 좋게 생각한다. 난 나일론 천주교 신자라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는 게 처음에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아버님 어머님과 성경구절 읽고 가족을 위한 기도를 나누고, 같이 성가도 부르다 보면 (그 와중에 서로 화음 넣으시는 아버님, 어머님을 보고 처음엔 예배 중에 빵 터져서 웃음 참느라 힘들었다) 이것도 추억이고 소소한 재미겠구나 싶다. 


그래선지 나는 코로나 때도 명절 때 크게 무리가 안된다면 시댁을 갔다. 물론 거리두기를 엄수하긴 했지만, 서로 안전하게 지내면서 가끔 만나는 정도는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다. 지금은 거리두기도 완화됐고, 올해는 태어난 지 70일이 채 안된 둘째가 살짝 걱정이긴 했지만 카시트에서 잘 자는 모습을 보고 이번에도 시댁에 다녀오기로 했다. 문제는 짐이었다. 점심, 저녁 두 끼 먹고 오는 당일치기 짐인데도 아기 분유, 젖병, 옷, 가제수건, 젖병 세제, 바운서, 역방쿠, 아기띠 등. 가져가야 할 짐이 너무 많았다. (바운서나 역방쿠는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었을 것도 같다. 아기는 어딜 가나 적응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고생은 남편 몫이었다. 나는 아기띠에 둘째만 안전하게 잘 태우고 챙기면 되지만 그 외 모든 짐은 남편이 들고 실어야 한다. 다섯 살인 첫째는 지 장난감이나 잘 챙겨주면 한몫 다 하는 거다. 특히 먹이고 재우는 타이밍을 맞추다 보니, 생각보다 준비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 명절이라 차가 막히는 점 등 쉽지는 않았다. 그럴 때 나타난 역전의 용사는 첫째였다. 둘째 상태가 궁금할 땐 첫째가 리포팅을 해줬다. "엄마, 눈 뜨고 있어", "쪽쪽이가 빠졌어" 등 첫째가 둘째의 컨디션을 잘 파악해주고 여차하면 쪽쪽이도 물려주는 등 듬직한 오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최근에 야심 차게 마련했던 로봇청소기가 청소 도중 남편의 잠옷 바지를 빨아들인 채 멈춰버려 집에 돌아왔을 때도 마룻바닥이 지저분하긴 했지만, 둘째의 기저귀를 갈지 않은 채 차에 타서 둘째가 집에 오는 길에도 잠을 잘 못 자고 방금 전 겨우 잠들긴 했지만, 첫째의 팬티와 둘째의 바디로션을 챙기지 않아 첫째는 노팬티고 둘째의 몸이 살짝 건조해지긴 했지만, 어머님이 물어보실 때마다 다 챙겨달라고 하는 며느리 욕심에 음식 보따리와 둘째 짐까지 짐이 점점 더 많아져 동네 사람들의 안쓰러운 시선을 받으며 남편이 두 번이나 짐을 나르느라 고생하긴 했지만, 어쨌든 이번 추석 연휴도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 듬뿍 받으며 아이들은 귀여움을 잔뜩 뽐내고 잘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에 한가위 보름달이 떴길래 첫째에게 소원을 빌어보라고 했다. 첫째는 너무나도 귀엽게 "달님아, 슈퍼윙스 장난감이 어서 오게 해 줘"라고 말하고 곧 잠에 들었다. 집에 도착해보니 달님이 소원을 들어줬는지 로켓 배송 덕분인지 첫째 장난감이 문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내일 아침, 첫째가 얼마나 행복해할지 나까지 벌써부터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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