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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Sep 11. 2022

추석 연휴가 이렇게 긴 건 처음이야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80일째

9월 11일 일요일 흐리고 가을비 조금


나에게 명절 연휴의 정의는 이렇게 달라져왔다.


30년 전: 친척집에 가서 신세계를 경험하는 날

20년 전: 친척 어른들께 용돈을 거둬들이는 날

10년 전: 집에 들렀다 친구들과 음주가무 벌이는 날

5년 전: 와이프랑 부모님들 찾아뵙고 술 마시는 날

1년 전: 연휴를 맞아 첫째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날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명절을 대하는 태도는 많이 달라졌지만, 올해는 정말로 느낌이 다르다. 주말이 붙어있는 5일 '황금연휴'건 주말을 포함한 3일짜리건 간에 이때까지 한 번도 명절 연휴가 이렇게 길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지금 꼴랑 이제 금요일부터 3일째인데 무슨 소리냐 하실 테지만 내 입장에선 그렇다.


어젯밤 아내와 명절을 기념해 조금 색다른 기분을 내 보고자 직접 추석 특선 영화로 고른 <우리는 동물원을 샀다>를 보고 잤다. 추석에 걸맞은 따뜻하고 착한 가족 영화이긴 한데... 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어쨌건 그걸 보고 늦게 잤어도 아침에 애 두 명이 늦잠을 자게 내버려 두진 않는다. 아내가 둘째랑 아침잠을 더 자는 사이에 첫째를 데리고 새로 산 장난감을 가지고 놀면서 아침을 먹이면서 생각했다.


추석 연휴가 오늘까지인 줄 알았더니 내일도 쉬는 날이네…? 왜 이렇게 길지?!’


잠시 후 일어난 아내도 아직 연휴가 이틀 더 남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오늘 뭐할지 내일은 또 뭘 할지를 고민했다. 마침 장모님 댁에 아직 있었던 형님한테 연락이 와서 일단 그쪽으로 넘어갔다. 어른 여섯에 애들 네 명이 한 집에 모여서 고기도 구워 먹고 막걸리도 한 잔 하면서 한번 더 명절 분위기를 냈다. 그치만 이미 금요일에도 모였었고 어제는 우리 부모님 댁에 갔다 왔으니 3일째면 가족이 모인 명절 특유의 분위기도 살짝 식상해질 만하다. 그나마도 형님네 식구들은 점심 식사 후에 오래지 않아서 집으로 갔다.


그 뒤로도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장인 장모님과 아내는 낮잠을 좀 자다가 산책을 하러 나갔고 나는 처가댁에 혼자 남았다. 사실 나는 처가댁에서도 별로 눈치를 안 보고 편하게 있는 스타일이다. 맨발로 소파에 누워서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책을 봤다. 야구 경기는 오늘따라 매가리가 없이 노잼이고 경기력도 형편없었다.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것들을 해봐도 마땅히 재미난 게 없다. 아무래도 주말에다 추석 연휴니까 뉴스도 평소보다 덜 올라오고, 주식시장은 당연히 휴장, 친구들은 명절 스케줄이 바쁜지 카톡방도 조용하다. 뭘 해도 시간이 잘 안 가고 금세 지루해지니 마치 '정신과 시간의 방'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산책을 나갔던 아내에게 빗방울이 떨어져서 우리 집으로 피신했다고 연락이 왔다. 우리 집은 처가댁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굳이 빨리 올 필요는 없다고 해서 느긋하게 저녁 식사 시간 가까이에 집으로 갔다. 이제 다시 여기부터는 평소와 같은 저녁 풍경이다. 애들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고, 놀아주다가 재운다.


오늘 이렇게 하루가 지루했던 이유는 뭐였을까 생각해 봤다. 일단 역시 제일 큰 이유는 출근을 안 하는 휴직 기간의 명절이라 어차피 연휴가 끝나도 학교든 회사든 안 가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오지 않았으면' 하는 날은 더 빨리 다가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 계획도 없던 나의 안일함이 더 큰 이유다. 물론 연휴라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을까봐 아기를 데리고 가기에 꺼려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잘만 생각해봤으면 분명 더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계획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번 추석이 과거의 명절 연휴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하루하루를 실제로 더 길~게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연휴 중에 하루 정도는 술판을 벌였고, 다음날이면 숙취해소 겸 밀린 잠을 보충하느라 반나절이 지나갔다. 아니면 아내랑 OTT 콘텐츠 하나를 정해서 한 시즌을 거의 밤새 정주행 해버리면 역시나 다음날은 반나절이 삭제되곤 했다. 이런 식으로 이틀 정도를 보내면 연휴가 끝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명절 연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렇게 시간을 아껴서 쓰진 않았다.


반면에 지금은 새벽에도 아침에도 깨어있는 시간이 많고 밤에는 소중한 자유시간을 알뜰하게 보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당연히 실제로 하루가 길어졌고 예전처럼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정신승리를 하기엔 오늘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오늘 밤엔 아내와 머리를 맞대고 긴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을 즐겁게 마무리할 스케줄을 알차게 계획해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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