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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02. 2022

I can't do this every day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8일째

7월 1일 금요일 맑음


드디어 장마가 끝나고 후덥지근한 여름이 시작됐다. 오늘도 역시나 아침부터 오후까지 스케줄이 빽빽했다. 우선 아내와 첫째에게 아침을 차려주고, 유치원 버스를 타러 나가는 것을 배웅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사실 우리 가족은 아침을 제대로 먹지 않는 편이다. 보통 과일과 빵과 견과류와 시리얼 등으로 해결한다. 아침을 제대로 차려줘야 더 쑥쑥 자랄 텐데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냥 뭐 서양식 아침식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한의원에 갔다 와서 아내와 테크노마트에 갔다. 핸드폰을 둘 다 같이 바꾸기 위해서다. 우리 부부는 아이폰 14가 나오기 직전인 지금까지도 둘 다 아이폰 7을 쓰고 있었다. 아 물론 아이폰 7이 출시된 2016년에 사서 여태껏 쓰는 것은 아니고, 3년쯤 전에 원래 쓰던 폰이 용량이 턱없이 부족해서 기계값만 내고 바꿨던 것이다. 그 당시 용량이 모자란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첫째가 태어나면서 동영상을 마구 찍어댔기 때문이었다...!


이번엔 용량 문제는 없었지만, 핸드폰 성능이 확실히 좀 떨어진 것이 느껴졌고 아이폰 7 같은 유물을 아직도 쓰냐며 지독한 구두쇠처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은 부담이 됐다. 물론 개인적으로 기능 몇 개 꼴랑 추가하고 신제품이라고 내놓는 핸드폰 회사들이나 2년 약정의 노예로 전 국민을 볼모로 삼고 있는 통신사들의 장단에 맞춰주기 싫어하는 타입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꿀 때가 됐다. 둘째가 태어나면 인물사진 모드로 찍어서 인스타에도 예쁘게 올려줘야지.


핸드폰 매장이 모여있는 곳에 가긴 갔는데, 핸드폰 기종이나 요금제 등에 전혀 관심이 없다가 갑자기 바꾸려니까 쉽지 않았다. 덜컥 첫 방문한 매장에서 계약할 뻔하다가 그래도 세 군데는 돌아야지 하면서 다니다 보니 조금 파악이 됐다. 살 것처럼 해놓고 안 사면 매장 직원이 싫어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아내에게 우리가 소비자인데 왜 그런 걸 걱정하느냐고 하면서 '당당해질 결심'을 하기도 했다. 


다니다 보니 영화 볼 시간이 다가왔다.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 작품이다. 휴직을 시작하고 일주일 만에 벌써 세편째 영화관에서 관람하는 영화다. 원래 영화깨나 보는 사람이라고 자부하는 아내와 나였지만 코로나와 육아의 협공 속에서 지난 2년간은 일 년에 극장에 오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코로나 거리두기 제한도 풀리고 영화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는데 마침 이 타이밍에 휴직을 시작했으니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헤어질 결심은 좋은 작품이었다. 애플 협찬 광고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애플의 전자기기들이 영화 내용이나 장면에 좀 과하게 등장하는 점이 약간의 옥에 티였지만, 사실 영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거의 모든 장면을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담아내는 연출력은 기가 막힐 정도였고 그 일면에는 아이폰과 애플워치의 역할도 컸다. 무엇보다도 평론가의 극찬을 받으며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는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멜로와 형사물이라는 두 가지를 결합한 독특한 장르인데 멜로 영화로도 형사 수사극으로도 모두 훌륭했다. 배우들 연기도 좋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시 알아봤던 핸드폰 매장 중 한 곳으로 가서 핸드폰을 바꿨다. 아이폰 13 미니. 이름은 '미니'인데 아이폰 7보다 오히려 화면이 더 크다. 심지어 기계값도 안 냈다. 진작에 바꿀걸. 아내는 첫째 하원을 하러 먼저 떠났다. 어차피 IT는 내 담당이니 아내의 것까지 내가 다 해줘야 한다.


집에 오니 장마 동안 놀이터에서 못 놀아서 한이 맺혔는지 동네 모든 아이들이 놀이터를 점령하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 부모들과 마주치는 것은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래도 조금씩 적응이 되고 있다. 오늘은 아빠 육아휴직 동지도 한 명 만났다. 그 아빠는 곧 복직할 예정이었고 이제 막 시작한 나를 부러워했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기력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딱히 뭘 계속 해줘야 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는지 계속 지켜봐야 하고 가끔 개입도 해야 한다. 애들 수준에 맞춰서. 그리고 워낙 많은 아이들과 사람들이 있다 보니 어른들 생각대로 애들이 놀지는 않는다. 계속 사소한 문제가 생기고, 아이들은 번갈아가며 떼를 쓴다. 그리고 남의 애는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러한 엔트로피의 극치 속에서 시달리다 보니 아 이거 정말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은 못 할 것 같은데. 가끔 비가 오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와서는 첫째에게 이제 한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놀이터에서 못 놀 것 같으니까 좀 덜 더울 때 많이 놀아두라고 괜히 밑밥을 깔아 두었다.


그리고 매일 하기에 버거운 것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이 일기 쓰기다. 처음엔 그냥 일기니까 매일 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8일째 쓰다 보니 이게 점점 어렵다. 쓸 것도 없는 하루였던 것 같다가도 막상 쓰다 보면 2000자씩 글을 쓰고 있다. 오늘은 딴짓을 하다가 늦게 시작했더니 새벽 1시가 넘었다.


우리들의 해방일지...계속 이렇게 쓸 수 있을까?

아마 조만간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일기 쓸 힘도 없다'라고 한 줄 쓰는 날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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