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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l 02. 2022

날씨가 기분이 되지 않게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9일째

7월 2일 토요일 더움


무지막지한 더위가 시작됐다. 아침 10시에도 덥고 오후 4시에도 덥다. 물론 아직은 막 40도 가까이 기온이 올라가는 폭염은 아니지만 며칠 전까지 기승을 부렸던 장마의 습기가 남아있는 탓에 후덥지근한 날씨였다. 아무래도 날씨가 더워지면 다들 평소보다 예민하고 짜증도 많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원래 나는 더위를 잘 타지 않는 편이니까, 내가 이 정도로 더우면 아마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더위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다.


만삭 임산부인 아내는 아마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덥고 불편하고 짜증이 날 수밖에 없다. 나름대로는 이해하고 받아주려고 노력하지만 쉽진 않다. 여기에 아이도 본인 스스로는 날씨가 더워서라고 생각 못하겠지만 평소보다 말도 안 듣고 자주 칭얼댔다. 확실히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면 우리 세 식구는 버튼만 한번 잘못 누르면 화가 나오는 자판기 같았다. 아침부터 서양식 아침밥상을 함께 먹으면서 그랬고, 토요일마다 첫째가 다니는 잉글리시 에그라는 영어 놀이 학습 센터 수업이 끝나고 친구 A의 집에서 놀다가 왔을 때도 그랬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어떤 여자 죄수가 발바닥을 모기에 물렸다며 이런 말을 한다.

"긁으면 간지럽고! 안 긁으면 가렵고!"

사실 오늘 우리 집 상황은 이것과 비슷했다.

"에어컨 틀면 냉방병 걸릴 것 같고! 안 틀면 덥고!"

확실히 오늘 아침에도 아이는 콧물을 좀 흘렸다.


현시점에서 집에 계속 있는 것은 여러모로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에는 시원한 쇼핑몰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안 덥고 배도 부르니 한결 서로 웃으며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내친김에 올리브영에서 폼클렌징도 사고 탑텐에 가서 티셔츠도 몇 벌 샀다. 싼 걸 사더라도 역시 소비는 확실한 행복이다.


쇼핑몰 지하에 있는 마트도 들렀다. 사실 휴직하고 일주일간 집에서 밥을 먹다 보니 냉장고에 먹을게 너무 없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돌아다니며 먹고 싶었던 것들을 주워 담고 시식도 골고루 해보았다. 마트 이모님들이 아이가 귀엽다며 서비스도 많이 챙겨주었다.


집에 와서 아내에게 휴식시간을 주고 혼자 아이를 데리고 자전거 가게에 갔다. 우리 아들 자랑을 좀 하자면, 이 녀석은 작년 3월, 그러니까 만 3세도 되기 전에 보조바퀴 달린 두 발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뒤에 어른이 잡는 손잡이가 붙어있어서 잡고 밀어주거나 핸들을 돌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근데 처음엔 그걸 어른들이 밀어주고 다녔는데 혼자 탈 수 있게 되면서부터는 잡지 말라고 난리를 치곤 했다. 벌써부터 자립심이 참 투철하다. 그래서 오늘 아예 어른이 잡는 손잡이를 떼 버리고, 핸들과 안장도 높여주었다. 신이 나서 길에서도 자꾸 혼자 마구 달려가려고 해서 붙잡느라 고생했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저녁시간에도 위태로운 전투준비태세가 한두 번 벌어졌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사실 얼마 전부터 유행하듯이 자주 언급되는 조언 중 하나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을 생각해보면 그 기분에는 결국 날씨의 영향이 큰 것 같다. 이제 7월 시작일 뿐인데, 계속 집에서 얼굴을 맞대고 지낼 휴직 생활을 슬기롭게 보내기 위해서는 날씨가 기분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오늘따라 더 짜증을 냈던 순간들이 있었다. 아이가 화장실에 갔다가 실수로 변기에 엉덩이가 빠졌을 때, 아이의 자전거가 맞은편에 오는 사람과 부딪힐 뻔했을 때, 조금 장난스럽게 자전거를 타면서 핸들을 이상하게 돌리다가 넘어질 뻔했을 때. 사실 이런 순간들은 아이를 나무라기보다는 놀라거나 다치지 않았는지 살피고 좋게 타일렀어야 했는데 날씨가 기분을 예민하게 만들었던 것이라는 핑계를 대 본다.


날씨가 기분이 되지 않기 위해 일단 서큘레이터를 하나 장만해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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