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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n 27. 2022

괜찮아, 잘하고 있어

우리들의 해방일지: 아내 3일째

6월26일(일) 하루 종일 습하고 우중충, 온다는 비는 결국 안 옴 


아침부터 일찍 잠이 깼다. 일찍이라기엔 7시를 약간 넘긴 시간이지만, 너무 습하고 더운 날씨에 눈이 절로 떠진다. 아이와 남편은 곤히 자고 있다. 지난 1년간 새벽 기상을 한 적이 많아서인지, 아님 내가 우리 중에 가장 나이가 많기 때문인지 잘은 모르겠다.


아침부터 아이 옆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대면서 아이를 귀찮게 했다. "일어나~ 엄마랑 놀자~"

내가 먼저 아이에게 일어나서 놀자고 한 적은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그동안은 늘 아이가 눈을 떠서 "엄마!!!!"를 세네 번은 불러야 내가 달려갔다. 자다가 간 적도 있고, 일을 하다가 간 적도 있다. 새벽 시간은 나에게 늘 피곤하거나 긴박했다. 아이에겐 이러한 변화가 신선하면서도 기분 좋은 충격일 것이다. 잠에서 깬 첫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엄마의 뽀뽀세례를 받으며 일어났고, 아침부터 엄마가 "우리 넘버블럭스 놀이하자"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여유로움을 만끽하는 우리 세 가족이었다. 


오전엔 아차산에 다녀오기로 했다. 오늘 기상청 예보는 오전 우중충, 오후엔 소나기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기는 싫지만 어디 거창하게 멀리 다녀오기도 번거롭기에, 우리는 바람 쐴 겸 가까운 아차산으로 향했다. 아차산에 새로 숲 놀이터가 개장했다고 들었다.


아차산은 첫째가 아기 때부터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장소다. 우리 신혼집이 아차산이 품은 광장동, 광나루역 인근에 있었다. 고즈넉한 광장동 성당 근처의 작은 빌라가 우리가 처음 신혼살림을 꾸린 곳이고,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약 9개월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첫째 육아휴직 때 유모차를 끌고 아차산 자락을 많이도 다녔다. 친정엄마랑도 다니고, 남편이랑도 주말에 종종 산책했다. 아이가 없는 신혼 땐 잘 안 갔는데, 아이가 태어난 뒤에 오히려 많이 갔다. 광장동에 아이랑 놀만한 놀이터나 공원시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숲 놀이터나 유모차를 끌고 다닐 수 있는 데크길도 생겨, 아차산은 아이랑 다니기 더 좋은 자연놀이터가 됐다. 숲 놀이터에서 잠깐 아빠와 놀던 아이는 금방 질려하고, 데크길을 가자고 했다. 데크길에는 번호가 달린 가로등이 쭉 있는데, 첫째는 그 숫자를 하나하나 세길 좋아한다. 몸이 무거운 임산부 아내와 아이의 저질체력이 걱정됐는지 남편은 공원에서 놀기를 바라는 눈치지만, 아이도 나도 데크길이 훠얼씬 좋다. 나는 나무 냄새, 풀냄새, 산 냄새 맡는 게 좋고 아이는 장애물 없이 앞으로 전진하며 숫자를 셀 수 있다는 게 신이 난다.



한참 걷던 아이가 뒤돌아보며 나에게 말한다. "엄마! 괜찮아! 잘하고 있어!" 뭐지? 이 감동멘트는? 내가 뒤뚱뒤뚱 걷는 게 걱정돼서 하는 말인가? 혼자 감동에 젖어 걸어가다 보니, 똑같이 적혀있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아, 이걸 보고 읽은 거구나. 분명 남편이 시켰을 테지만, 그래도 고마웠다. 그리고 이 말이 나에게 직빵으로 효과 있는 힐링 멘트라는 걸 아는 남편의 세심함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꾸 최악의 경우의 수까지 따져보며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성향이 나에겐 있다.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내 이런 성향이 일할 땐 도움이 되지만 살아가는덴 그닥 도움 되는 거 같진 않다. 내가 나를 좀 먹는 기분이랄까? 우리 부부가 둘째를 갖기로 결심한 뒤, 남편이 둘째가 태어나면 육아휴직을 쓰겠다고 했을 때도 나의 첫마디는 "왜?" 였던 것 같다. 육아휴직이 내 커리어에 있어서도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데, 남편의 커리어까지 굳이 방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성격도 성향도 다른 남편과 나의 삶에서 우선순위 1번은 같다. 우리 가족의 행복. 그리고 뭣보다 남편은 나를 안심시키려 늘 노력한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연애시절부터 그가 늘 나에게 던지던 말들이다. 넌 있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남편은 그간 나를 납득시키려 애써왔다. (물론 동시에 나를 갈궈대는 것도 꾸준히 잘한다. ㅎㅎ)


아차산을 잘 다녀온 뒤 오후에 청소를 하고 저녁은 친정엄마가 특식을 해주셔서 근처 친정집에 들러 먹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조금 임박하게 횡단보도를 건너야 해서 남편이 첫째를 들쳐업고 뛰었다. 난 만삭의 몸으로 뒤뚱대며 뒤따라 뛰었다. 간신히 초록불 안에 길을 다 건너서 씩씩대고 있는데, 첫째가 나에게 말한다. "엄마가 못 따라올까 봐 걱정했어." 몸이 무거워져 늘 천천히밖에 못 걷는 엄마가 꽤나 걱정이 됐나 보다.


남편도, 아이도 어떤 날은 웬수같지만, 또 돌아서면 세상에 이만큼 든든한 기둥이 없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내 해방 동지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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