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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내누 Jun 27. 2022

근거 있는 자신감

우리들의 해방일지: 남편 4일째

6월 27일 월요일 비

한 번에 합격(?)


어젯밤 아내와 크게 싸웠다. 싸운 이유는 지금 와서 보면 어이없는 사소한 것이었다. 밤에 아이가 일찍 자는 날이면 종종 영화를 한 편 보곤 한다. 근데 어제 보던 영화가 하필 내용이 아이가 유괴당하는 스토리였다. 아내는 영화를 보다 말고 첫째 이름을 잘 지은 건지 모르겠다는 걱정을 했다.


사실 요즘 우리 부부의 가장 주된 관심사는 곧 태어날 둘째 이름 짓기였다. 이름은 인생에 정말 중요하니까 당연히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첫째 때도 한참 고민해 후보를 몇 개 정하고 지인들에게 투표까지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사주와 작명을 하는 전문가가 지은 이름으로 결정됐다. 너무 흔하지도 않고 촌스럽지도 않고 사주에도 맞고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


근데 이제 와서 단지 영화에 나오는 몇 장면을 보다가 뜬금없이 첫째 이름 탓을 하니까 나로서는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첫째 이름을 지은 분에게 둘째 이름도 지으려고 미리 연락을 해두었고 그때도 아내는 딱히 반대하지 않았다. 또 시작이다. 근거 없는 불안감.


결과적으로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언성을 높이며 서로 상처 주는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다행히 6년쯤 결혼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싸워도 빨리 화해하는 법을 조금 터득했다. 이번 일은 시작이 어찌 됐건 말싸움 중에 내가 잘못한 것들이 많이 있었고 아침에 곧바로 아내에게 사과했다.


실은 오늘은 여러 계획으로 꽉 찬 날이었다. 아내가 회사에서 얻은 호텔 뷔페 식사권도 쓸 겸 장모님과 청와대 관람하는 예약도 해두었다. 일단 아침 9시에 첫째 유치원 등원을 시키자마자 피부과로 가서 얼굴에 난 종기 같은 여드름을 치료했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 합류하신 장모님을 모시고 남대문 매리어트 호텔 뷔페로 향했다. 비가 오는 창밖을 바라보면서 월요일 점심부터 호텔 뷔페를 먹는 호사를 즐겼다.


청와대 관람은 1시 30분 타임이었다. 갔다 온 친구가 조언해준 대로 서울현대미술관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청와대를 한 바퀴 돌았다. 월요일이고 비가 오락가락 내리는 날씨에도 방문객들이 꽤나 많았다. 마치 베르사유 궁전 같은 본관, 한옥 고택 펜션처럼 멋들어진 관저가 인상적이었다. 서울 시내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여기에 산다면 대통령이고 뭐고 매일 휴가 온 기분일 것 같았다.


청와대를 구경하는 중에 희소식도 있었다. 지난주 신청했던 브런치 작가 신청이 통과된 것이다. 여러 번 낙방(?)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이렇게 한 번에 통과되다니...! 아직 글도 한 개도 안 쓰고 계획과 샘플 링크만 제출했는데...(물론 그 뒤로 바로 쓰기 시작해 6개나 됐지만) 거봐 내가 뭐랬어. 된다니깐.


청와대를 뒤로 하고 다시 거의 1시간을 운전해 집으로 돌아왔다. 비가 생각보다 많이 왔고, 청와대가 생각보다 넓어서 힘들었지만 아침부터 오후까지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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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MBTI 유형이 ENTJ이다. 원래는 ENTP였는데 바뀌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플랜을 짜고 그대로 실행하려고 하다 보니 바뀐 줄 알았다. 근데 아무래도 내가 '계획충'성향이 강해진 것은 결혼 후인 것 같다. 그렇다. 내 J가 극도로 강화된 것은 바로 아내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아내는 유독 근거 없는 불안감과 걱정이 많은 타입이다. 함께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그냥 직관적인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수많은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을 실행할 계획을 세워야만 설득할 수 있었다.


물론 인생을 살아가면서, 특히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는 즉흥적인 의사결정보다 계획적인 것이 좋다. 과거의 나는 약간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타입이었다. 무조건적인 낙관주의, 지나친 긍정적 자기애. 하지만 실제로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내가 즉흥적으로 결정한 것들은 돌이켜보면 실수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리 가족은 잘하고 있다.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

이것은 '근거 있는 자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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