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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I Jul 31. 2021

기대와 감동의 분기점, 성취 나들목

"엄마, 엄마!! 우리 학교에 도서실이라는 게 생겼어요. 책이 정말 많아요." 


   흥분한 내가 실내화 주머니를 현관 한편에 던지며 소리치며 들어왔다. 반지하의 나의 집은 크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미싱 소리를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말을 했는지 다시 묻는다. 


"학교에 도서관이 생겼는데요. 거기서 책을 빌려준데요. 여기 도서카드만 있으면 된데요. 그런데 도서실이랑 독서실이랑 다른 거예요? 


   도서실과 독서실의 구분조차 없던 내가 처음으로 책을 재미로 접한 나이는 국민학교 2학년 때이다.(5학년 때 초등학교로 바뀌었다.) 지금은 모든 학교에 도서관이 잘 만들어져 있고, 지역사회에서도 쉽게 도서관을 볼 수 있지만 내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90년도 유년시절에는 구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할 정도였으니 어린 나의 흥분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책에 이렇게 흥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직도 20대를 사시는 이모의 영향도 크다. 같은 해 1학기 때 요절하신 20대의 이모님은 어린 나에게 이별의 선물로 노벨 문학상 전집과 세계문학전집을 선물로 주시고 떠나셨다. 번역도 투박하고 한글 계정 전의 출판본이라 어색한 부분이 많았지만 누런 색의 양장 커버는 마치 금장처럼 내 책장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서 빛났다. 당연히 각 종 위인전도 있었고, 백과사전 전집도 있었다. 집에도 충분히 책이 많다고 생각했지만, 교실 하나에 미로처럼 펼쳐진 책장 그리고 그 사이사이 가득 꽂힌 책들의 규모와는 비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신비한 책들이 존재했다. 무서운 이야기들을 담은 책들, 세상에 신비한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들, 영혼을 따듯하게 해 준다는 책, 지혜를 준다는 책 등등 평소에 읽지 못했던 책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어린 내 눈을 사로잡기에도 충분했다. 그중 몇 번을 읽었던 책이 있다. 제목이 가물가물 하지만 "앗 세상에 이런 일이" 이런 식의 제목이었다. 다리 달린 뱀도 있었고, 인어에 대한 소개들도 있었다. 조잡한 합성 사진에 현실 불가능한 일들을 마치 사실처럼 서술하고 있는 책들이었다. 그중 어린 나에게 버킷리스트를 만들어준 내용은 바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소개하는 부분이었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인어나 다리 달린 뱀은 볼 수 없지만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실재하는 것이니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가보고 싶다는 단순한 어린날의 다짐이었다.


   그저 현실성 없는 호기심이었기에 어린날의 버킷리스트 따위는 쉽게 잊고 살았다. 호기심의 성취보다는 대입이 먼저였다. 그리고 취업이 우선이었다. 이후에는 버킷리스트 따위는 몽상가들이나 쫓는 뜬 구름 같은 것이라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리고 난 그런 헛된 상상의 목전에 서있다.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문제의 장소가 나온다. 내 버킷리스트로 들어가는 문은 상당히 컸다. 붉은 돌의 건축물은 아침의 일출과 함께 맹렬하게 타올랐다. 여기까지 온 여행객들의 수고로움을 인정해주는 웅장함인가? 아니면 아무나 들여놓지 않겠다는 의지의 크기인가? 문은 그저 수줍은 손을 벌리듯 대답 없이 버티고 서 있고, 내가 다가갈수록 점점 커져갈 뿐이다.


   문의 크기만큼이나 기대가 커져만 간다. 다른 여행객들을 따라서 정해진 통로로 발을 옮겼다. 아그라의 뿌연 스모그에 흐린 하늘이지만 거대해지는 문을 지나 서자 타지마할이 눈앞에 들어온다. 나의 표정은 달아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수록 얼굴은 붉어졌다. 숨은 가슴을 지나지 못했다. 더 걸을 수 없어서 넘어선 문턱 앞에 멈추어 섰다. 놀란 입의 꼬리는 점점 올라갔다. 호흡을 빼며 웃음이 나왔고 허리는 좀 더 시점을 높이기 위해 빳빳하게 펴졌다. 다섯 손가락은 활짝 피고 팔은 자연스럽게 떨어뜨렸다. 어중간한 머리카락은 바람에 날리지만 시아를 방해하지 않아 그대로 둔다. 눈은 집중하며 더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이 떨린다. 그러자 눈을 반짝이게 하기 위해 모여있던 눈물이 한데 모여 코를 타고 흘러내렸다. 몇 차례 손으로 눈물을 훔쳤지만 기대와 감동의 분기점에서 두 감정의 합류는 이유 모를 눈물의 정체를 만들어 냈다. 


   갑작스러운 눈물에 가장 당황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부끄러운 듯 고개를 떨구고 허탈하게 웃으며 이유를 찾는다. 이 묘지 주인의 러브 스토리 때문은 아니다. 또 위대한 건축물의 작품성 때문도 아니다. 그저 나의 기대와 현장의 감동이 교차하면서 때아닌 청승을 만들어 낸 것이라며 핑계대어 본다. 발걸음을 움직여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첫사랑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가슴이 벌렁 인다. 신기할 따름이다. 순백의 건축물에 티라도 남을까 봐 발에는 덧신을 신었고, 걸음은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타지마할의 내부로 들어갔다. 그 안은 눈에는 텅 빈상태로 보였지만, 가슴에는 기대와 감동으로 가득 차 보였다. 

   

   여행 전까지만 해도 열의 세 곱절까지의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고집과 신념 그리고 내 어쭙잖은 가치관을 지키느라 쉬운 길을 돌아가기도 했고, 보장된 길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이루고 싶었던 것들을 자의에서 그리고 타의에서 무너뜨리며 살아왔다. 이런 실패의 연속은 스스로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로 만들었고, 비관이라는 오라로 내 손 발을 스스로 결박하게 하였다. 주변에서 위로해주는 말들도 그저 부담이고, 나에 대한 칭찬도 나를 과대평가하는 거라는 걸로만 들렸다. 그랬기에 도망가기 위해 떠났던 호주행도 실패하여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이 내용은 언젠가 친절하게 다뤄보겠다.) 이런 시간이 몇 년이 반복되자 나에게는 아무런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오늘, 어린 날 평생의 버킷리스트였고 잃어버렸던 꿈을 눈앞에 두었고, 손으로 만졌으며 가슴으로 교합하였다. 그렇게 내 평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에 줄을 그었다. 마음의 파피루스에 적힌 이 한 줄에 빛이 다른 리스트에도 드리우고 보이지 않던 목록들도 희미하게 하였다. 채도를 높인 사진처럼 이유라는 색들이 나에게 가득 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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