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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I Aug 10. 2021

하나를 버리고 하나를 얻다.


   버스는 계속해서 인도의 뿌연 흙먼지를 뚫으며 가고 있다. 한참을 온 것 같은데, 아침이 밝아 오는 것 같은데 버스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 달려 나갈 뿐이다. 창 밖으로 빛의 조짐이 보인다. 나는 너무나 뜬금없이 잠에서 깼다. 아직 뜨지 않은 태양의 밝음 때문도 아니고, 버스의 덜컹거림 때문도 아니었다. 그동안 나를 심하게 괴롭혔던 물갈이의 흔적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모든 상처는 딱지가 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벗겨질 때 간지러움이 심해지는 것처럼 나의 장도 마찬가지였다. 급하게 휴대전화를 꺼내어 위치를 확인했다. 적어도 두 시간 또는 세 시간을 더 가야 하는 거리다. 점점 표정이 오묘해진다. 참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렇지 않기도 했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긴 호흡을 해보지만 마음의 안정을 그리고 장의 안정을 유지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정신이 천국과 지옥 사이에 머무를 때쯤에 버스는 공터에 멈춰 섰다. 휴게소였다. 급하게 탈출하듯 버스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뛰기 시작했다. 긴박하다. 그 어느 영화의 추격전보다 속도감이 넘쳤다. 영화 속 주인공이 모퉁이를 돌아서는 그 순간 적을 마주하듯이 나는 화장실을 향해 달려서 건물 뒤편 모퉁이를 돌아서는 순간 적을 만났다. 이 방해자만 넘어서면 바로 앞에 화장실이다. 그러나 여기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나는 숱한 엑스트라처럼 비참하게 죽고 말 것이다.

   나의 방해, 나의 적은 바로 생각하지 못했던 위생 시스템의 화장실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그리고 상상도 못 하여 본 상황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이미 푸세식 화장실을 섭렵했다. 그러기에 어느 곳에서든 생리적 현상은 잘 해결해 왔다. 이 모든 게 외가, 친가의 조부모님 덕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그들이 정성껏 훈련시켜준 내용 이외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서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작렬하게 전사할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대로 넘어질 수는 없다. 본능은 강하다. 본능은 초월적이다. 잠깐의 주저함 속에서 눈에 결의를 불태웠다. 입은 굳게 다물면서 코 평수를 좁힌다. 숨을 참는 것이 아니다! 그저 명사수가 격발 전 호흡을 가다듬듯이 나의 임무에 집중하기 위해서다. 지금이다! 지금! 드디어 연옥에 있던 나의 정신은 해방을 맞는다. 이제 발걸음을 버스로 돌린다. 버스의 좁은 개선 문을 통과하는 나의 눈 빛에는 평안함만이 감돈다. 그리고 자리에 다시 올라 비어진 속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조드푸르로 가던 길의 휴게소

   충분히 안정을 취했을 법한 시간이 지나고 버스는 종착지에 도착했다. 드디어 블루시티 조드푸르다. 휴대폰을 꺼내서 지도를 보니 숙소까지의 거리가 걸어서 한 시간 정도이다. 침대 버스에 계속 누워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하여 좀 걸을까도 생각했지만, 본인의 고생을 우려했던 발은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여 릭샤 앞에 섰다. 가격을 흥정하는데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다. 머리는 발에게 장을 비워냈기에 몸이 조금 가벼우니 걸어가는 것이 어떨지 제안했다. 잠시 머뭇거리던 발도 기분 좋게 동의했다.

   릭샤꾼은 당황했다. 흥정도 제대로 하지 않고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보며 눈을 크게 뜨고 따라붙었다. 내가 다른 릭샤에 타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기 위해서다. 내가 걷기 시작하는 것을 본  다른 릭샤꾼들도 따라붙는다. 나는 계속 걷는다. 그러다가 다가와준 그들의 정성에 답하기 위해 가격 정도는 물어보는 예의는 지킨다.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가격이다. 그렇기에 계속 걸었다. 보통은 흥정을 시도해야 정상일 텐데 가격만 묻고 걷는 얄궂은 나를 보며 그들은 계속 당황했고, 나는 계속 걸었다. 그렇게 20분이 넘게 걷고 있던 중 처음에 나와 흥정을 했던 진념의 릭샤꾼이 다시 말을 건다.


 "처음에 당신이 제시한 가격으로 해줄 테니 타세요."


   이 사람의 진념과 직업정신에 웃음이 났다. 더는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얄궂은 나이기에 조금 더 짓궂게 대화를 이어나가기로 했다.


"나는 벌써 절반을 걸어서 왔습니다. 처음에 제가 제시한 가격으로 가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처음 제가 제시했던 가격의 절반으로 갑시다."    


   릭샤꾼은 본인의 진념만큼이나 얄망궂은 나의 고집을 알아봤는지 단번에 오케이를 한다. 그제야 나는 릭샤에 오른다. 30도가 넘는 도로에서, 그것도 거침없이 내리쬐는 인도의 해 아래서 한두 시간 걸어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가격 흥정을 못하면 언제나 걸었다. 훌륭한 협상 기술은 아니다. 흥정이 귀찮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으면서 많은 것을 볼 수 있었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선택한 것이다.

    릭샤는 좁은 골목길 언덕 앞에 멈추어 섰다.  이상은 릭샤가 들어갈  없기에 내려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꼬여버린 일정으로 인해 숙소 예약도 엉켜버렸. 그래도 다행히 호스트의 친절로 인해 무리 없이 예약을 변경할  있었.

   골목에 들어선 지 10여분이 지났는데 게스트하우스가 보이지 않는다. 같은 장소를 몇 번이나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든다. 미로처럼 꼬여버린 좁은 골목길은 긴 밧줄이 되어 발을 옭아 매고 있었다. 마치 무협지에서 은밀한 장소를 찾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무림 고수가 펼쳐 놓은 진법과 같았다. 또 똑같은 장소다. 무거운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허리는 점점 굽어졌다. 주변에는 영어조차 못하는 동네 아이들밖에 없다. 쟤네들이 뭘 알겠냐만은 다른 방도가 없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내 질문을 받은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웃으면서 '지금까지 이것 때문에 이 앞을 돌고 돌고 또 돈 거야?'라는 눈빛을 하며 자신들을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아이들을 따라서 10미터 정도 이동을 하니 그렇게 찾고 헤맨 게스트 하우스가 등장했다.

   아직도 멍청함의 딱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비워내려고 노력했는데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동내 아이들이라는 것을,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겨우 내가 갖고 있는 정보는 사전에 커뮤니티를 통해 위치나 건물 외벽 사진을 숙지한 정도였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 저들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얼굴이 붉어지고 창피함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의 과도한 자만이 나의 눈을 흐린다는 것을 깨닫게 한 어린 구루(Guru)들에게 붉어진 얼굴을 숨기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짐을 풀고 숙소 루프탑에 올랐다. 그리고 최대한 경건하게 자리를 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어느 정도 차분해지기 시작할 때 눈을 뜨니 점심의 식사가 눈앞에 있다. 생각에 굶주렸던 만큼 허기가 깊었기에 빠르게 먹고 그 자리에 눕는다. 인도의 하늘이 이렇게 푸르고 높았던가? 푸르름만큼 마음도 경건해진다. 높은 하늘은 그저 내가 깨달은 한 끼를 흐뭇이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독수리가 선회할 뿐이다. 가네샤가 보낸 새인가? 내가 제대로 된 지혜를 얻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듯, 내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 위를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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