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함이 넘치는 여행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잦은 정전과 노후화된 시스템은 불편함을 넘어서 아무것도 행동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 들린 카페에서도 정전이 되기가 일 수다. 그러기에 한낮의 더위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그저 숙소에 있는 것이다. 천장에 붙어있는 팬 마저도 정전으로 그 움직임이 멈추면 방문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간다. 좁은 문을 열고 들어선 루프탑에는 배낭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에어컨 없는 한국의 여름은 이제는 상상할 수 없지만 얼음 물통을 갖고 학교를 다녔던 90년대의 유년시절이 떠올라 코끝을 찡그린다. 어린 나는 책상 모서리에 사정없이 얼음 물통을 내리치면서 여름을 이겨냈었다. 작은 얼음 조각을 먹기 위해서 수없이 움직여야 했었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으면 덜 목마르고, 덜 더웠지 않았을까? 그때 그대로 성장한 나는 지금도 작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수없이 움직여왔다. 그리고 여기 인도에서 그 동작을 멈추었다.
루프탑에 올라 눈을 감는다. 그리고 침묵한다. 북적이던 사람들의 소리도 귓가에서 사라진다. 그러고 있노라면 조용히 바람이 불어온다. 밥 딜런의 노래 "Blowin' In The Wind"의 가사 내용처럼 나름 철학적 질문들을 던져놓고 불어온 바람이 주는 답을 길고 엉클어진 머리칼로 듣는다. 살며시 나부끼는 답변을 듣고서 순간을 놓칠까 아쉬워 갈색의 노트를 꺼내 팬을 든다. 그리고 천천히 적어 내려간다.
삶이란 주어졌기에 그저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어졌을 뿐이죠.
그래도 조건과 이유가 존재할 터인데
하늘조차 그 이유를 쉬이 알려주지 않더군요.
늘 염려와 불안의 삶을 살았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했기 때문이죠.
주변에서는 다들 염려는 병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염려하지 않으면 삶을 잃을 것 같았습니다.
그대는 어떤 삶을 살고 계신가요?
그 삶을 제게 들려주시겠습니까?
저는 여기서 하늘에게 묻고,
청천에게 답을 얻습니다.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이 흘러가죠.
한 번은 함께 울어주기도 하더군요.
그리고 어떨 땐 위로의 박명을 보여줍니다.
삶을 통시하는 답변과 깨달음도 아직은 얻지 못했지만
저는 이런 삶을 살려고 합니다.
추상적인 것이 저와 닮지 않았나요?
혼자의 시간이 찾아왔을 때 나는 불안했다. 혼자였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혼자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속세의 모든 연을 끊고 그저 혼자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사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것은 해탈이나 열반이 아니다. 그저 끊어냄이었다. 그런데 막상 혼자가 되어보니 그립고 그리웠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덩그러니 놓여져 보니 불안하고 불안했다. 끊어내기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혼자 일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럴 때면 나에게 필요한 사람들이 기억났다.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나를 인지하게 해 주었다. 그렇기에 두려웠다. 더 이상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무의미해질까 봐 겁이 났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집착에서 비롯됐음을 알지만 난 싯다르타가 아니다. 깨달은 자들에게 나는 그저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그러기에 충분히 두려워할 권리는 있다. 그렇게 조용히 펜을 들어 엽서에 적어 넣는다. 한 장 한 장 각각의 내용을 담은 엽서를 내 오른편에 쌓아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