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끼리는 많은 정보를 공유하곤 한다. 좋은 숙소와 맛있는 식당 그리고 환상적인 장소까지 여행을 하면서 그들에게 듣는 정보는 상당히 유용하며 매력적이다. 그러다 보니 즉흥적으로 동행을 이루기도 하며 기존의 일정을 모두 포기하고 새로운 루트로 접어들기도 한다. 인도는 다른 여행 지역들보다 현지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공유가 특히나 많았었다. 고된 여정을 함께하는 사람들 간의 동질감이 다른 지역보다 큰 것일까? 아니면 무엇이든 흡수하는 인도인들의 마음에서 교훈을 얻은 것일까? 이유야 잘 알 수 없지만 그만큼 마음이 열려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만큼 친해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처음 인도 여행의 일정을 짤 때는 바라나시와 타지마할을 본 후에는 남쪽으로 또 남쪽으로 이동하여 반드시 히피들의 영혼의 고향으로 알려진 고아와 함피를 가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여행은 계속 서쪽으로 진행했으며 그리고 이제는 북쪽으로 오르고 있었다. 나는 여유가 필요했다. 생각할 수 있는 공간과 생각의 영감을 만들어줄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히피들의 고향으로 떠나려 했던 것이다. 휴식은 언제나 인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쉬면서 히피들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그 안에 앎도 함께 존재하리라 생각했다. 또 그들의 깨달음이 필요했었다. 그러나 나는 인도의 북쪽으로 산과 숲이 우거진 마날리로 향하고 있었다.
이곳의 날씨는 가을처럼 시원했다. 밤 버스를 타고 이동 중에 찬 바람에 눈을 떴을 정도로 춥기도 했다. 처음에는 에어컨을 과하게 튼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에 머리 위에 있는 송풍구에 손을 뻗었지만 찬 바람은 창문 틈 사이로 불어오는 것이었다. 담요를 꺼내고 두꺼운 옷을 입은 현지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반팔 차림은 나뿐이었다. 준비되지 않은 나는 어정쩡한 눈을 비비며 창문 밖을 보니 내가 탄 버스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 끝에 매달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그 아래로는 옥색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저 강은 무엇을 녹여냈기에 저렇게 푸르게 빛날까?"를 고민하고 있을 때 버스는 조용히 멈추어 섰다. 그리고 양들이 버스 사이로 지나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이 버스 후미로 사라지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동이 걸린다.
버스를 타기 전 나는 분명 낙타와 뜨거운 볕에 빨래처럼 마른 개들을 보며 사막에서의 뜨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고,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시원한 공기와 양들이 지나는 계곡이 펼쳐진 마을에 와있었다. 푸르른 녹림은 마을을 끌어안고 있다. 숲은 마을을 가로지르는 천을 내어 사람들의 해갈을 풀어주었다. 공기는 신선했다.
나의 여유를 시기라도 하듯이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잠깐은 멈추었으면 좋겠다고 웅얼거리기라도 하면 심통쟁이 시간은 순간으로 답했다. 반대로 빨리 지나갔으면 할 때는 천천히 흐르며 4살짜리 애처럼 마음을 뒤집어 놓았다. 시간은 상대성이 있어서 적용자의 분위기에 따라 그 길이가 달라지나 보다. 그러기에 눈꺼풀이 몇 번 깜빡이지도 않았는데 천천히 보내고 싶은 하루가 지나가고, 수없이 눈꺼풀을 움직여도 빠르게 보내고 싶은 하루는 멈춰있나 보다. 그러다 보니 분주해지고, 나는 시간이 주는 잡념에 갇혀 길을 잃는다.
이곳의 숲은 길 잃은 나를 품어준다. 테라스에 앉아 있을 때면 안개 머금은 아침의 태양은 길 잃은 나를 위로하듯 눈앞에서 한참을 하늘거렸다. 안개의 공연이 끝나면 인터미션 없이 바로 구름이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 앉은 그대로 짜이 한 잔을 하면서 갤러리의 작품을 바라보듯 지나가는 구름을 세고 있다 보면 차가운 바람이 방문하고, 난 그 소리에 뜨거운 짜이를 청해 보기도 한다. 상수와 하수에 있는 숲에서부터 어둠이 흘러 들어오고 무대는 막을 내린다. 그러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노승(올드 몽크/럼주)을 찾아 문을 두드린다.
노승은 내게 저 멀리 보이는 히말라야에는 힌두교의 신 시바가 살고 있다고 전해준다. 아직도 그가 그곳에 존재하는지는 모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산을 오르기도 했다. 마치 신을 찾아 떠난 여행자처럼 나는 산을 올랐다. 그저 물어보고 싶었다. 지난 10년의 삶이 무너지고 나는 방향을 잃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지 몰랐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원론적인 부분부터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이고, 어디로 가는가? 걷는 내내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 무엇도 길을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이런 산 중의 신비한 곳이라면 아바타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그저 기대에서 끝났다. 나의 카르마가 선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설산 가득한 꼭대기를 멀리서만 바라본 후, 처진 어깨를 더 떨어트리고 산을 내려왔다. 돌을 밟고 흙을 밟으며 걷고 있던 중 머리 위에서 떨어진 나뭇잎이 볼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뒤이어 바람이 불어와 몸을 감쌌다. 냇가의 물은 소리를 내어 위로하였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서러움이 아니라 포근함에 눈물이 떨어졌다. 내 주변을 날던 까막새는 소리 내어 울어주었다.
고아와 함피에 있어야 할 내가 인도의 북부를 방문한 것은 그저 여행 중에 충동적으로 한 선택이었다. 고아의 바다는 분명 나를 품어주었을 것이며, 그 따듯함과 포근함에 여유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히피의 깨달음은 나에게 만족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다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바다와 돌산이 아닌 숲이 우거진 산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는 내 선택이 옳았음을 느꼈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