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이 없는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선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이제는 익숙해진 풍경들을 감상하며 입을 멍하니 벌리곤 한다. 모래 먼지바람을 맞으면서 한 시간가량 달려서 도착한 시내는 공사가 한창이다. 길을 막고 공사하는 구간이 많아서 교통체증이 심하다. 버스가 느려지고 밖에서 불던 바람도 잠잠해지면 버스 안이 더워진다. 그럴 때면 중간에 내려서 에어컨이 있는 버스로 갈아탔다. 내가 느끼는 체감상 물가가 비싸지 않았기에 쉽게 갈아탈 수 있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몇 십원 몇 백원이 비싸다고 느껴져서 걸어 다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변화다.
인도 여행을 시작한 지 40여 일이 지난 시점에서 내가 쓴 돈은 8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기존 예산에서 70만 원이나 남은 셈이다. 그러기에 더 이상 빵 쪼가리로 때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식당도 자주 가고, 끼니도 거르지 않는다. 남는 것에 대한 기쁨인지, 아니면 남았음에서 오는 여유인지, 애매한 변화에서 오는 패턴에 스스로가 우습다. 그래 봐야 하루에 5천 원 정도 더 쓰는 것이 전부이지만 엄청난 자신감이 생긴 듯 지갑에서 돈을 빼서 지불한다. 그런 생활이 3~5일 지속되었을까? 큰일이 발생했다. 바로 인도 정부에서 기습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체 신나게 놀고 숙소로 들어서는 순간 홈스테이 호스트가 나를 부른다.
"내일부터 500루피, 1000루피의 고액권은 사용을 못해. 인도 정부에서 화폐 개혁을 하면서 고액권을 쓰지 못하게 했어. 은행에서 고액권을 신권으로 바꿔줄 거야."
처음 이야기를 들으면서 해외 토픽 뉴스를 보듯이 다른 나라의 일이라 생각했다. 사실 다른 나라이지 않은가? 다만, 내가 그 나라를 여행하고 있음을 망각한 것이다. 또 별일 아닌 것처럼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내가 갖고 있는 고액권은 얼마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갖고 있는 고액권으로는 숙소비를 선지불 하면 되고 내일 아침 ATM에 가서 필요한 돈만 찾으면 되었다. 그러기에 은행에 갈 필요도 없었다.
"우선 숙소비를 선지불 할게요. 구권받아주시죠?"
"응, 그런데 너 쓸 돈은 있어?"
호스트 아저씨가 심히 걱정스러운 듯한 눈으로 내게 물었다.
"네, ATM기를 사용하면 돼요."
"내일부터 ATM도 사용할 수 없어."
이게 무슨 상황인가? 기습적으로 시행한 화폐개혁에 현지인들도 여행자들도 난리가 났다. 고액권이 대부분인 여행자들은 "어디 ATM에서는 인출이 가능해"라는 루머만을 믿고 동분서주하기 바빴다. 환전이라도 해볼 생각에 환전소들을 찾아다녔지만, 비싸게 부르거나, 환전이 가능한 환전소를 찾을 수 없었다. 은행에서 해결될 수 있을까 싶어서 은행을 가보았지만 인도의 인구가 많다는 것만 체감할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위기에 강하다!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여시키고 보니 상황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서 체류일 만큼 방값을 계산하면 내일 밥조차 사 먹을 돈이 없음을 인지하고 며칠 앞당겨서 체크아웃을 하기로 하고, 인터넷에서 결제가 가능한 호스텔을 예약 후 이동을 했다. 이제 환전 가능한 환전소만 찾으면 된다. 여전히 ATM은 다시 작동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남은 돈도 거의 떨어져 간다. 이대로라면 인도를 떠날 때까지 나는 굶을 수밖에 없다. 환전에 실패한 채 '어떡하지'라는 말풍선만을 수없이 그리며 걷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른다.
딱 봐도 믿음이 안 가는 청년이 환전을 도와주겠다며 나를 부른다. 환전소에서도 환전이 중단된 마당에 무슨 수로 나를 도와주겠다는 건가? 말도 안 된다는 생각에 배짱을 피우면서 환전소와 비슷한 환율로 불렀다. 몇 차례 대화과 오고 가고 급적 타결에 성공을 한다. 조건은 이랬다. 환전소와 동일한 환율로 해줄 테니 기념품점 2곳만 함께 들려달라는 것이다. 구매는 하지 않아도 된단다.
나는 딱 봐도 믿음이 안 가는 이 친구의 차에 올라탔다. 그는 바로 20루피 한 뭉치를 내 손에 쥐어주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몇 차례 확인을 해본다. 내 의심과는 다르게 정확하다. 그리고 그의 제안대로 2곳의 기념품 매장을 갔다. 믿음이 안 갔던 이 청년에게서 신뢰가 생기며 기분이 좋아진다. 대화가 많아지고, 날 위기에서 도와준 이 청년에게 감사함이 느껴진다. 돈도 생겼겠다. 커피와 다과를 함께한다. 그도 내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 4시간을 함께 이야기며 오랜 벗처럼 함께 했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새로 옮긴 호스텔에 들어섰다. 같은 방을 쓰는 게스트 친구들이 나를 보면서 좋은 일이 있냐고 물을 정도로 표정이 밝아졌다. 기분이 좋다. 참 단순한 것에서 행복을 얻는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든다. 이 순간도 여기 호스텔도 그리고 함께 로비에 앉아서 가끔 짓궂은 질문을 던지는 같은 방 친구들도 모두 마음에 든다.
이곳은 외형도 내부도 상당히 깨끗하고 마음에 들었다. 인도의 평균 깨끗함을 넘어선 숙소이다. 샤워실은 공용이지만, 따듯한 물만 잘 나온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비용도 저렴하다. 아주 마음에 든다. 같이 방을 쓰는 친구들도 조용히 잠을 청하는 친구들이기에 분위기도 좋았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한 번은 잠을 자는데 팔이 가려워서 잠에서 깼다. 어둠 속에서 손톱이 팔을 긁어 내려가는데 뭔가 통통한 것이 손 끝에 닿았다. 뭔가 싶어서 눌렀는데 끈적한 것이 묻어난다. 다른 움직임이 없기에 음식물 정도라고 생각하고 손가락을 튕겨 벽 쪽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이 벽에 '탁'소리를 내며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는 다시 잠에 들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내 팔은 모기 자국으로 난리가 나있었다. 일반적인 모기 자국과는 달랐다. 마치 줄을 세워 놓은 것처럼 나란히 물려 있었다. 어젯밤 일이 생각이 나서 내가 손가락으로 튕겨 보낸 그것을 확인하러 벽을 살펴보니 벽에는 핏자국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세끼 손톱 반만 한 빈대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인도는 이렇듯 심술궂게 이별을 고했다. 십리를 가다가 발병이라도 나면 다시 돌아올까 해서 이런 심술을 부리나 보다. 아니면 인도의 신은 늘 침묵으로 깨달음을 주었듯이 나를 떠나보내기 전에 또 다른 깨달음을 선물 주는가 보다. 그러기에 나는 인도를 떠나기를 주저했다. 떠나야 할 때 나는 그곳에서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돌아설 수 없었다. 그래서 마음의 한 편을 그곳에 두고 떠나왔다. 그리고 두고 온 마음 때문에 아직도 그리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