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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도 '나'였던 시절이 있었을까

13화. 엄마의 시간 속에 숨어 있던 소녀

by 딩끄적

"엄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을까?"


눈을 감고 엄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여럿 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엄마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던 날이다. 초등학교 다닐 즈음이었던 것 같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원래 항상 안방에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언니와 내가 함께 쓰는 방의 더블 침대에 있었다. 엄마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고, 나는 엄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엄마는 내 머리카락과 얼굴을 쓰다듬으며 엄마의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는 전라남도 함평이 고향인데, 엄마가 어렸을 때 살던 집 앞에는 개울가가 있었고, 학교를 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고 한다. 겨울엔 개울가의 얼음을 깨고 빨래를 했던 것,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돌아가신 외삼촌 이야기,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엄마를 많이 예뻐해 주셨던 것, 돌아가시고 나서 힘들었던 이야기, 외할머니가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고생하신 이야기, 그리고 엄마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다던 이야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려워진 형편으로 엄마는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하셨다고 한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외할머니가 중학교는 보내주지 않으셨다.


엄마는 그게 마음에 상처이자 아쉬움으로 자리 잡았었다. 그래서 우리 삼 남매를 낳은 이후, 방송통신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하셨고, 중 · 고등학교 졸업장을 마흔을 앞두고 그제야 받을 수 있었다.


어렸을 때 하고 싶던 공부를 제대로 못했던 탓에, 엄마는 우리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다 해주려고 하셨다.


어느 정도로 믿고 지지해 주셨냐면,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만둔 피아노를 고등학교 1학년이 마칠 무렵에 다시 하겠다고 하는 딸의 말을 듣고 학원에 등록시켜 주신 분이다. 물론 '음악치료사'가 되고 싶은 나의 목표를 확실하게 말씀드렸기 때문이긴 했다. 결국은 될 수 없었지만.


이렇게 엄마는 우리의 모든 꿈을 응원하고 지지해 주셨다. 나는 그런 엄마가 좋았다. 엄마의 어렸을 때 이야기를 듣는 것도 정말 좋았다. 어렸을 때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의 이야기가 신기하고 재밌었다.


엄마의 이야기 덕분에, 얼굴도 모르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정말 사랑했다. 그렇게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그 시간이 정말 좋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내 얘기만 하기 시작한 게.


언젠가부터 내 얘기만 주야장천 하고 엄마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 같다. 내 할 말을 다 하고 나면 바쁘다고 돌아섰던 것 같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분명 엄마에게도 '나'였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는데. 엄마라는 새로운 역할이 생기고부터, '나'였던 엄마를 엄마는 잊고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너무 속상하고 마음이 아팠다.


엄마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엄마는 이제 자신을 잊게 된 걸까?


엄마에게 한참 이런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엄마! 엄마는 하고 싶은 게 뭐야? 하고 싶은 거 없어? 왜 없어~ 하고 싶은 게 있어야지! 그래야 삶이 즐겁지!"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엄마로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어서 '나'라는 존재를 잊은 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이 하고 싶으신 것보다, 자식이 하고 싶은 것만 생각하고 살아오셔서, 삶을 즐기는 방법을 당신도 모르게 잊으신 건 아닐까.


그런 엄마에게 왜 하고 싶은 게 없냐고 다그치기만 했던, 왜 엄마는 삶을 즐길 줄 모르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했던 나 자신이 너무 밉고 싫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엄마. 분명 꿈도 많았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너무 많이 좌절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흘러나왔다.


"지금 엄마의 꿈은 무엇일까? 엄마에게 꿈이 있을까?"


엄마로서 살아온 세월이 길어, 이제 엄마는 꿈을 꿀 수 없게 되어버린 건 아닐까. 갑자기 문득, 다 커서 듣는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궁금했다. 듣고 싶어졌다. 그리고 엄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엄마, 어렸을 때 엄마의 꿈은 뭐였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어?"


"엄마, 지금 엄마의 꿈은 뭐야? 엄마는 언제가 가장 행복해?"



이제부터라도 '나'였던 시절의 엄마를 되찾아 주고 싶다. 누구의 엄마가 아닌 '나'로서의 엄마. 엄마가 '나'로서의 자신을 찾고, 행복하게 인생을 즐기셨으면 좋겠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박막례 할머니처럼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남은 인생은 하고 싶은 것을 모두 즐기며 사셨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에게 해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엄마를 평생 응원하고 지지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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