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양관식은 아니다

12화. '폭싹 속았수다'를 보지 못한 이유

by 딩끄적

최근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인기가 정말 뜨거웠다. 이상형이 '양관식'이라는 사람들, 내 남편은 '양관식', 우리 아빠의 '양관식' 시절 등 다양한 경험담이 쏟아졌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양관식 같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든든한 '양관식'이라는 존재로 너도 나도 행복해하는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빠는 '양관식'과 거리가 가까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매정한 아빠도 아니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분명 아빠를 좋아했다. 삼 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는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자라면서 아빠한테 혼나 본 적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고, 담배 사러 가는 아빠를 쫓아가서 유일하게 잔돈을 용돈으로 받던 나였다. 언니는 나에게 화가 났을 때 가끔 이런 말을 했었다.


"너는 아빠가 예뻐하는 아빠 딸이니까."


그 정도로 나는 아빠에게 예쁨을 많이 받았고, 정말 좋아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아빠는 남편으로서, 아빠로서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그만두었다. 그리고 구할 때까지 무턱대고 일을 쉬었다. 수입 없이 지출만 가득한 나날을 엄마는 견뎌야 했다. 아빠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많이 부족했다.


그런 아빠가 첫 번째 사업을 시작했고, 5년도 채 지나지 않아 부도가 나고 말았다. 우리 가족은 그때 처음으로 무너졌다. 집 안 곳곳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다행히 엄마의 빠른 판단으로 집만큼은 가까스로 지킬 수 있었다.


이때 처음으로 아빠의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빠는 한국에서 더 이상 이 일을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외국에서 일할 수 있는 회사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처음으로 떨어져 살게 되었다. 아빠는 1년에 한 번 한국에 올 수 있었고, 그땐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국제전화가 유일한 소통 수단이었다. 우린 매주 일요일을 그렇게 기다렸다.


아빠가 외국에 간 지 수년이 지난 어느 날,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아빠는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다고. 정확히 말하면 회사가 너무 힘들다고. 회사에서 CCTV로 직원들을 감시하고, 기본적인 대우조차 해주지 않았던 것이었다. 외국에서 고생하는 아빠가 그런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에 우리 가족은 분노했다. 결국 아빠는 그 회사를 그만두고,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빠가 머물고 있던 외국에서 시작한 사업이었다. 엄마는 대출을 받아 아빠에게 사업자금으로 건넸다. 처음엔 괜찮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빠의 두 번째 사업도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전화를 할 때마다 '돈 없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그 말이 점점 우리를 지쳐가게 만들었다. 그 당시 오빠와 나는 학생이었고, 계속 빚을 내어 생활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내가 사회초년생이 되었을 무렵,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아빠에게 내뱉고 말았다.


"아빠, 그냥 들어와서 같이 살자. 돈도 없는데 거기 계속 있으면서 굳이 떨어져 살 필요 없잖아."

"아빠도 너희 보고 싶고, 가고 싶지. 그런데 한국 가면 아빠가 할 일이 없잖아."


"아파트 경비든 뭐든, 찾으면 할 일은 있어. 솔직히 말해봐. 거기 혼자 사는 게 좋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때 아빠와 크게 싸운 후, 나는 아빠와 더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어렸을 때 그렇게 좋아했던 아빠에게,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빠에게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말로만 보고 싶다고 하는 아빠. 돈을 보내줄 땐 다정했지만, 그렇지 않을 땐 늘 불평하던 아빠.


언젠가부터 아빠는 나에게 든든한 존재가 아닌,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늘 불안했다. 내가 결혼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빠의 영향도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돈 없어도 괜찮았다. 우리가 벌면 되니까. 그저 화목한 가족,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아빠, 여전히 엄마를 온 마음 다해 사랑하는 아빠. 그거면 충분했다. 그런데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걸까?


나는 아빠와 여전히 연락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가 없다. 서로에게 상처될 말을 할 게 뻔하기 때문에. 우린 그렇게,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 아빠를 그 누구보다 사랑했고 좋아했던 내가, 그 누구보다 큰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서게 되었다.


나는 '폭싹 속았수다'를 보지 않았다. 아니, 보지 못했다. 1분짜리 영상만 보고도 펑펑 울었던 나이기에, 쉽게 볼 수 없었다. 드라마 속 '양관식'이라는 아빠는 마음속 깊이 묻어두었던 '아빠에 대한 상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묻어두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상처였다.


"수틀리면 빠꾸. 아빠 항상 여기 있어."

그 한 마디에,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상처가 순식간에 드러났다. 드러나다 못해 쑤시고 후벼 팠다. 상처가 드러나고 후벼 파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그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졌다. 그날 밤, 나는 소리 내지도 못하고 엉엉 울었다. 눈물이 왜 나는지도 모르고. 그냥 눈물이 나니까. 마음이 아프니까.


난 아빠를 나쁜 사람으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가족도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질 수 있다.'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폭싹 속았수다'를 볼 용기가 없다.

그걸 본 순간,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될 것 같아서,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아빠들이 양관식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아빠가 나쁜 사람인 것도 아니다. 그냥 살다 보니, 사는 환경이 그래서, 몸이 멀어져서, 생각이 달라져서, 마음이 달라져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뿐이다.


아빠와의 관계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다. 아직은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언젠가, 용기를 낼 수 있는 날이 오거든, 그때 생각해보려고 한다.


keyword
이전 11화엄마를 처음으로 '여자'로 이해하게 된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