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야행1988'

"술기운이 걷히자, 사랑과 우정의 진실이 밤길 위에 떠올랐다"

by 무한자연돌이끼

전신이 마네킹마냥 꼿꼿하게 굳어버린 듯한 몽롱한 기분이다. 의식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손발을 움직여 보려고 하면 도저히 말을 듣지 않는다. 그렇겠지. 그렇게 많이 마셔댔으니…. 갑자기 몸이 앞으로 꼬꾸라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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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 죽을라고 환장을 했어!”


갑자기 정신이 확 들었다. 운전기사의 목소리였다.


“이새끼 죽여버릴라, 똑바로 다녀!”


누군가 무단횡단하다가 차에 부딪힐 뻔한 모양이었다. 누굴까…? 물론 취객이겠지, 나와 같은. 차는 다시 움직였다. 기사는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개새끼 술 마셨으면 얌전하게나 있을 일이지 어디라고 차도로 뛰어들어! 쌍놈의 새끼!”


꼭 나 들으라고 한 말 같다. 얼굴이 확하니 달아올랐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 염려했던 대로였다. 낯선 장면들이 뒤로 흐르고 있었다. 한 예닐곱 정류소는 지났을까 추측해 보았다. 버스 안을 돌아보았다. 다섯 명 나까지 여섯 명. 운전기사까지 일곱 명. 모두 자기의 면적을 확보나 하려는 듯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세 명은 아직 졸고 있었다.


내려야 했다. 그러나 잠 깨고 금방 하차 문으로 달려나가기가 무안했다. 자리를 고쳐 앉았다가 두 정류소 지나서 내렸다. 열두 시 십오 분, 내가 타고 왔던 차는 쌩하니 달아나 버렸다. 혹시나 싶어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그러나 역시나였다. 술마시면서 돈을 다 써버렸다. 그나마 있는 토큰도 이제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돌아 나가는 차는 이미 다 끊어졌을 테니 말이다.


바람도 쐴 겸 술도 깰 겸 걸어가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간 남짓 걸어야 할까 머릿속에서 계산이 되었다. 하품이 나왔다. 걸음을 떼면서 나의 야행(夜행)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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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바악달재를~!

울고 넘는~ 우릿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나

와앙거미~ 이 지입을 짔는~”


설날이 보름 정도 남아서인지 달이 무척 밝다. 팔공산에 달만 떴다 하면 그 판은 싹쓸이였다. 쓰리고에 피박까지…. 그게 저번 추석 때의 일이었다. 그때도 달은 무척 밝았었다.


따라 걷는 그림자가 다정해 보였다. 친구가 생겨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바람이 차갑게 불어왔다. 가슴팍이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목도리라도 하고 집을 나서는 건데.


간간이 택시가 오고 갔다. 종종 내 옆으로 택시가 다가와 서기도 했으나 나는 모른 척하고 걷기만 하였다. 가로등 때문에 그림자가 길어졌다가 짧아졌다가 한다. 자동차가 지나갈 때면 멀리 있던 그림자가 다가와선 사라지기도 한다. 찬바람을 마셔서인지 술이 좀 깨는 것 같다. 술을 얼마나 마셨는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하여간 오늘만큼 많이 마셔본 적은 과거에 없었다. 내가 입대할 때도 이렇게까지 성대한 술상을 차려보지 못했으니까.


두수 녀석이 군대 간다고 초라하게 시작했던 것이 2차 3차 4차를 거치는 동안, 젊은 놈들의 혈기는 더욱 살아 술을 술같이 여기지 않고 시내 주점의 술독을 작살냈다.


두수와의 논쟁이 시작된 것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여성 동지를 위한 건배에서였다.


“신경질의 만수무강을 위해!”


신경질은 신경희의 별명이었고 두수와는 너나들이로 통하는 과 후배였다.


“영미의 행복한 결혼을 위해!”


내 입에서 느닷없이 영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거의 무의식적인 순간이었다. 두수의 미간이 순간 바뀌는 것을 발견했다.


“영미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다 끝난 일이라구.”

“아, 미안. 순간적이었다. 어떡하니? 이왕 나온걸.”


그러나 일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두수는 점점 영미의 생각에 사로잡히더니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는 내게 은근하지만 협박하는 듯한 위압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봐, 영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가 뭐야?”

“말했잖아. 순간적이었다구.”

“그걸론 해명이 안 돼. 영미하고 무슨 일 있었지, 말해봐.”

“자식, 놀구있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두수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한번 숙였다가


“그럼 어제 왜 영미가 날 찾아와서 네 이야기를 하면서 울었느냐 말이다!”


두수는 흥분되어 있었다. 반면에 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태연한 자세였다.


“영미를 만났었군. 뭐라고 하데?”

“뭐? 뭐라고 하데?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화를 내는 걸 보니 오해가 있는 모양이군. 흥분 가라앉히구 내 말 들어. 만난 건 사실이야. 어제 날 찾아왔더군. 내게 상의할 게 있다구.”

“그래서, 뭐라구 했어?”

“흥분하지 말고 내 말 들어. 네 사정 영미 사정 다 알고 있는 나야. 네가 영미를 사랑하고 영미도 널 사랑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네가 태도를 확실히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미는 늘 불안했던 거야. 내게 그러더군. 두수 씨에게 무슨 일 있느냐구. 뭐겠어? 딴 여자 있는 거 아니냐 그 말 아니겠어? 네 놈에게 여자가 한둘이어야 말이지.”

“시끄러워. 영미가 왜 울게 됐는지 그것만 말해!”

“넌 영미가 나 때문에 운 거라고 생각해?”

“그래.”


두수의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무슨 확신에서 저토록 단단하게 오해를 하고 있는지?


“정말 어처구니없군. 어디 들어보자 네가 왜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는지?”

“네가 말 안 하겠다면 좋다. 내가 말해 주지.”


나는 두수의 슬픈 듯한 큼직한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벌써 눈물샘에 압력이 가해지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날더러 군 생활 잘하라면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거야.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이제 끝이라면서 창호 널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면서 울었어. 이유가 뭔지 내가 대답해 줄까?”

“어처구니없는 여자군. 영미는 그렇다 치고, 네가 그 말을 믿는 걸 보니 한심스럽다.”

“뭐라구! 이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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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수는 순간적으로 일어서며 내 멱살을 잡았다. 옆에 있던 친구들이 달려와 말렸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싸움으로 번질 뻔했다. 아직도 왜 두수가 그처럼 흥분했는지 모르겠다.


바람이 또다시 세차게 불었다. 낙엽 쓸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널목을 건너려고 섰다. 신호등은 충혈된 빨간 눈을 깜박였다. 파란불. 건너면서 나는 여기가 대충 어디쯤인지 짚어보았다.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내가 지금 집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그것도 불확실했다. 동서남북이 헷갈렸다. ‘무조건 걷다 보면 눈에 익은 거리가 나오겠지’ 생각했다.


말다툼은 그렇게 해서 끝났지만, 영미라는 애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애로 둔갑하고 말았다. 왜 두수 앞에서 내 이야기를 했는지…. 뭐 사랑할 거라고? 날? 허 참. 같잖다는 듯이 헛웃음이 나왔다.


영미와 처음 알게 된 것은 두수와 같이 지리산 등반을 하면서부터였다. 삼박사일 동안 같이 있었어도 나는 어떻게 된 판인지 두 사람의 관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영미가 내게 보내는 눈길에 가끔씩 화끈 얼굴이 달아오를 때도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그러한 눈빛.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당시 두 사람의 사이가 극도로 나빴던 상태에서의 산행이었다. 그러면서도 같이 등반하는 걸 보면 두수나 영미나 둘 다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인 건 틀림없다.


언젠가 두수는 내게 이런 말 한 적이 있었다.


“영미야말로 진짜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여자다.”

“이 녀석 단단히 빠져있군.”

“하지만, 난 그 애를 차지할 수 없어.”

“왜?”


나는 이게 웬 흰소린가 싶어 반문했다. 물었다.


“느낌이 그래.”

“싱겁긴.”


하고 대화는 끝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두수는 두수대로 영미는 영미대로 각자의 생활을 할 뿐 만나더라도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이 애들이 서로 좋아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갈 정도였다.


그런데 사고가 생겼다. 따지고 보면 사고랄 것도 없지만 밸런타인데이였다. 두수에게 줄 줄 알았던 초콜릿을 영미는 뜻밖에도 나에게 주었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두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야, 창호 축하한다. 그게 바로 영미가 널 사랑한다는 말이다.”


하고 했다. 농담으로 들리긴 했지만 농담이라도 꺼림칙한 농담에 나는 네놈들 손에 놀아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영미 씨 고맙소. 안 그래도 입이 심심하던 차에 잘됐소.”


하고 그 자리에서 한입에 다 먹어버렸다. 영미는 그걸 싫어하지 않았다. 격이 없었던 그녀였다. 그래서 두수 녀석이 그녀를 좋아하는 건지…. 한번은


“영미 씨 나하고 결혼합시다. 두수 녀석 뭐 볼 게 있다고 그놈 좋아합니까?”


하고 농담을 던졌더니 대뜸


“날짜 잡읍시다.”


하는 거였다. 그 당시 그녀가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앞쪽에 큰 산이 보였다. 아마 저기 금련산이리라. 꼭대기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자기 집에서 보면 동쪽에 있었으니 좌측으로 꺾어서 길 따라가면 아는 길이 나오겠지 하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건널목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차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쳇, 내가 무슨 문화시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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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가로질러 뛰었다. 사실 뛸 필요조차도 없었다. 차는 그 이후로도 5분이 지나도록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괜히 겁을 먹었었다. 이젠 생각만 하는 건 심심했다. 노래라도 한 곡조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군가가 좋겠지.


“동이 트는 새벽녘에, 고향을 보며

외투 입고, 투구 쓰면~ 맘이 새로워

거뜬히 총을 메고 나서는 아침~”


노래는 잘도 목청을 빠져나와 주었다. 제대한 지 일 년밖에 되지 않아 가사도 잘 생각났다. 복학하고 나서 대모 대열에 끼어 배운 민중가요도 몇 소절 생각나는 게 있어 불러보았다.


“사랑스런 세상이 돌아와,

너와 나의 어깨동무 자유로울 때

우리의 다리 저절로 둥실~”


영미는 데모하다가 잘렸댔지. 대학 2년 한창 재미있을 때인데…. 영미는 퇴학당한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걸 자랑스럽게 여기지도 않았다. 시내에서 데모 대열에 끼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데모를 강요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거라면서…. 처음엔 영미의 그게 난 싫었다. 너무 당돌한 것 같아서였다. 말도 거침없이 했다.


한번은 자정이 다 되어 집에 찾아온 적이 있었다. 차비가 없어 차비 꾸러 왔다면서. 온 김에 쉬어 가겠다고 들어가도 되느냐구.


“자정이 넘어서 아가씨가 썩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 집에 찾아온다? 그렇게 좋은 풍경은 아닌 것 같소.”

했더니


“들어오지 말란 얘기 같군요. 그럼 할 수 없죠.”

“영미 씨답소. 들어오시오.”


그다음 날 어머니에게 꾸중 들은 것은 아직도 잊히질 않는다. 영미는 그날 토큰 하나 받아가지고선 내 방에 들어와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삼십 분 있다가 나갔다. 토큰 하나 받아가지고선 나갔는데, 나는 이미 버스 시간이 다 끝난 후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두수는 영미와 사흘 밤낮을 한방에서 지낸 적이 있다고 했다. 영미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자신은 계속 달래느라고 진땀을 뺐다고 했다. 당시 영미는 고등학교 내 동기 동식이라는 녀석에게서 빠졌다가 버림을 받은 직후였다. 두수가 동식이 절친이라 영미를 위로하게 된 것인데 그게 두수와 영미의 사랑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가끔 두수에게 동정이 아니냐고 물어보면 녀석은 손사래를 치며 부정을 했다. 그렇게 서로 사랑했다면 지금에 와서 어떻게 헤어질 수 있는가. 서서히 두수 녀석이 미워졌다. 영미만 불쌍해졌다는 느낌이었다. 동식이에게 차이고 두수에게 차이고, 이젠 내 앞에 나타났으니…, 아니다.


영미는 누구에게도 나타나 본 적이 없는 그런 여자다. 동식이가 좋아서 동식이와 만났을 것이며 두수가 좋아서 두수를 만났을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결코 결혼 따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전 그녀는 약혼을 했다고 했다. 다섯 번째 선을 본 남자라구. 나는 놀라 물었다.


“두수를 좋아하는 아녔어요?”

“끝났어요.”

“두수도 알고 있어요?”

“예, 알아요.”

“큰일이군. 정말 결혼할 거요? 그 남자랑?”

“물론이에요.”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들이었다. 나는 머리를 몽둥이로 강타당한 듯 한동안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영미가 내게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두수와의 애매한 관계를 어떻게 타결 지어 볼 수 없는지 물어보려고, 아니 부탁하려고 온 것이었다. 그렇게 매사에 당돌해 보일 만큼 거침없던 영미가 사랑 문제만은 제멋대로 할 수 없다는 데 대해 일말의 인정미를 느꼈다.


“그럼 아직도 두수를 사랑하고 있단 말입니까?”


내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쉽게 나와주는지는 모를 일이다.

영미는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큰일이군.”


나는 또 ‘큰일이군’ 하고 놀랐다. 아니 어떻게 된 건가?


“결혼할 거라면서요?”

“……”

“어떻게 된 거요?”


당신의 복장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거냐는 듯이 다그쳐 물었다.


“홧김에 약혼했어요.”

“왜, 두수가 피하고 있어서요?”

“그래요.”

“파혼할 건가요?”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두수 지금 가면 삼 년은 기다려야 되는데.”

“길지 않은 기간이에요.”

“두수가 영미 씨와의 마지막을 원한다면?”

“후련하겠죠.”


아, 위대한 여성이여! 시원시원한 말솜씨 하나 부럽구나. 실제로 영미는 그런 여자였다. 결과가 확실하다면 승복하고 만다. 후회가 없는 여자다. 미련도 없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왜 날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을까. 또 홧김에 그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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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추위가 심해진다. 벌써 한 시 반이다. 대체 여기가 어디지? 분명히 집 방향으로 한 시간이나 걸었으면 낯익은 거리가 나타날 듯도 한데…. 술은 완전히 깨어 있었다. 그런 만큼 점점 더 불안해졌다. 도저히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야밤에 미로 속을 헤매고 있는 신세라니.


택시가 뒤에서 불을 켜고 따라왔다. 택시를 탈까도 생각했다. 돈이야 집에서 주면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한 시간 동안의 걸음이 아깝다. 방금이라도 아는 거리를 만나게 되면 집 근처라는 걸 깨달을 텐데.


계속 걷기로 했다.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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