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창녕 부곡 노리 개무덤에 얽힌 이야기
(3)
오데까지 이야기했더노? 그래 월아 낭자하고 사달추수가 절벽에서 함께 뛰어 내린 데까지 했지? 그 일이 있고 나서 안 있나, 세월은 흘러 흘러가 천년이란 세월이 안 지났더나. 보자, 그때가 조선 중기쯤 됐을 낀데. 사달추수가 살았던 노리마을의 가을 풍경이 어땠는지 아나? 들판에는 황금색 벼들이 바람에 출렁출렁 춤을 추는 풍년이 안 들어 있었더나. 풍년이 들었으니 마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는 기라. 이젠 서로 왕래가 끊겨버린 이웃 임해진 마을도 마찬가지 아니겄나.
보름달이 하늘 가운데 휘영청 떠 있던 어느 날인 기라, 하도 신기한 일이라서 이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네. 사실대로 말해도 못 믿을 낀데. 그날은 말이다, 하늘에서 묘한 기운이 감돌더마는 흰색과 노란색을 번갈아 띠던 보름달이 조금씩 검게 변하는 거 아이겄나. 이거 무슨 일이고 싶데. 그라더마는 보름달이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니까 달 주변에 남아 있던 아주 희미한 빛이 길게 띠를 이루면서 노리하고 임해진 사이 절벽으로 떨어진다 아이가. 당연히 이 모습을 지켜보던 두 마을 사람들은 허둥거리면서 갈팡질팡 갈피를 못잡았지.
무슨 일이 일어났겄노? 참 신기한 일이 일어났는 기라. 이때 안 있나, 노리와 임해진 두 마을에서 동시에 강아지가 태어났는 기라. 머라꼬? 그기 뭐가 신기한 일이냐꼬? 그냥 강아지 같으모 한 개도 안 신기하지. 근데 말이다, 이 강아지들이 좀 특별한 기라. 노리에는 농부 박 씨 집에서 키우던 황구가 새끼 5마리를 낳았고 임해진에는 찰방 벼슬을 지내던 신 씨 집 백구가 2마리를 낳았는데,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아이가. 황구가 낳은 새끼 5마리 중에 맨 마지막에 나온 놈은 수컷인데 다른 강아지와는 달리 덩치도 컸고 억수로 건강했지. 그라고 백구의 새끼 중에서도 먼저 나온 강아지가 암컷이었는데 유난히 예쁘고 건강했다 아이가.
그런 일이 있고서 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 남지에는 종종 큰 장이 서거든. 어느날이었지. 농부 박 씨가 2년 된 막내 황구를 데리고 남지장에 갔다 아이가. 황구는 태어나고서 처음으로 주인을 따라 장에 나간 기지.
황구는 사람들의 다리 사이로 지나다니며 시장을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지. 괭이며 호미, 낫 등 농기구와 고기며 생선이며 먹을거리를 사는 박 씨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황구는 낯선 시장의 풍경을 눈에 담으면서 신이 났지.
그런데 식당이 즐비한 거리를 지날 때였는 기라. 황구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자꾸 뛰는 것을 느껴. 주인이 식당에 들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자기에게 줄 것이라고 해서 이렇게 두근거리지는 않을 낀데 말이다. ‘뭐지? 이 느낌? 뭐야, 이거!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황구는 박씨의 뒤를 따라 걸으며 묘한 기분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 앞으로 더 걸어갈수록 심장박동이 더 거칠어지는 거라.
그때였지. 하얗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개가 어떤 남자의 옆에서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는 거야. 황구는 숨이 멎는 듯 꼼짝하지 못하고 백구를 쳐다봤지. 백구라고 달랐겠어. 어느 순간엔가 흔들던 꼬리는 내려가고 걸음의 속도는 줄어들었지. 백구도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던 거야. ‘어? 뭐지’ 백구도 갑자기 숨이 가빠지기 시작해.
‘왜지?’
백구가 자신도 모르게 느낌이 닿는 대로 고개를 돌렸지. 그 시선 끝에는 건강하고 멋있게 생긴 황구가 서 있었어. 이럴 때 궂은 날이면 번개라도 한 번 쳐줘야 하는데. 치릿치릿. 서로 눈빛이 교차했을 때 황구와 백구의 머릿속에서는 어떤 낯익고 묘한 영상이 주마등처럼 번쩍번쩍하며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걸 동시에 느낀 거지. 그러다가 황구와 백구는 서로의 눈 속에서 아주 익숙한 장면을 발견하게 되지. 뭔지 알겠나? 그건 바로 인간으로 살면서 둘이 함께 절벽에서 떨어지는 모습이었던 거야.
“미안해요. 미안해요. 우리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아요.”
“그래요. 백년이 흐르든, 천년이 흐르든, 그때가 언제가 되었든 꼭 다시 만나요.”
무려 천년이 흐른 거야.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지만, 너무나 뚜렷한 기억이 망막에 맺히자 황구와 백구는 당황하기 시작했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계속 흐르는 거야. 아이구야! 시장 한복판에서 개 두 마리가 서로 마주 보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비쳤을까.
스무 걸음 이상을 걸었는데도 개가 뒤따라오지 않은 걸 눈치챈 박 씨와 신 씨는 지나왔던 길로 되돌아 왔지. 이들이 보기에 개 두 마리가 너무 심각하게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까 어떻게 끌고 갈 수가 없는 거야.
“낭자?”
“사달추수님, 이렇게 만나는군요.”
“정말… 낭자가 틀림없구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면 어때요. 이렇게라도 만났으니 다행인 거지요.”
“사달추수님은 어디에 사시나요?”
“노리에 있는 박 씨 집에서 살아요. 낭자는…, 혹시 임해진에?”
“네, 임해진 신 씨 집에 살고 있지요.”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흐른지 모르지만 서로 태어난 곳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려.”
개 두 마리가 소곤소곤 속삭이듯 소리를 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박 씨와 신 씨 두 사람은 개들이 계속 얘기를 나누도록 놔두고 싶었지. 하지만 각자 사정이 있고 시간이 촉박해서 어쩔 수 없이 자기 개에게 걸음을 재촉하니 어떻겠어.
박 씨가 황구의 목을 톡톡 쳤어.
“황구야, 가자.”
신 씨도 백구의 목을 살짝 두드렸지.
“백구야, 가자.”
그래도 개들이 꼼짝도 안 하는 거야. 두 개가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시장사람들에게도 신기해 보였던 거야. 이 개 두 마리한테 시장사람들이 죄다 몰려들었어. 그러니까 박 씨와 신 씨는 허허하고 웃을 수밖에 없는 게지.
박 씨가 웃으면서 말해.
“개들이 서로 눈이 맞은 모양입니다. 허허허.”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까지 어지간한 수컷은 마주쳐도 본체만체하던 놈이…, 그 집 황구는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허허허.”
신 씨가 농담으로 받아 대꾸를 하니까 박 씨도 농담을 덧붙이지.
“이참에 우리 개 사돈을 맺을까요?”
초면인 박 씨와 신 씨는 개 때문에 서로 어색하게 되니까 서로 농을 주고받았던 게지.
사달추수와 월아는 세상에 다시 태어나 처음 만났지만, 자신들의 의지로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 어차피 주인을 따라서 가야 하는 거니까.
“어쩔 수 없네요. 우리 전생에서 만나던 곳에서 다시 만나요.”
월아가 사달추수에게 급한 마음에 만날 약속을 정한 거야. 전생에서 만나던 곳. 둘이서 뛰어내렸던 절벽을 말하는 것이었지. 사달추수는 바로 절벽길을 떠올렸어.
“아, 그곳!”
사달추수와 월아는 박 씨와 신 씨를 따라 헤어지더라도 마음이 놓였지. 약속 장소를 정했으니 이제 언제든 둘만의 아지트 절벽에서 만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날 밤이 되자 개의 모습을 다시 태어난 사달추수와 월아는 서로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 마침 거울같이 밝은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생각이 간절했던 거야. 날이 어두워지고 달이 더욱 훤하게 빛나니까 달 속에서 서로의 모습이 자꾸 비치는 거지. 그라고 안 있나, 모두가 잠들 시각이 되니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노리와 임해진 사이에 있는 그 험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지.
길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예전의 모습이 하나도 안 남아 있거야. 나무도 풀도 전혀 다른 것들도 숲을 이루고 있었지. 둘은 전생의 기억과 감각에만 의지한 채 산을 올랐어. 한 걸음 두 걸음 산을 오르다 보니 길은 없어도 서서히 발을 내딛는 길이 익숙해지면서 서로 만나는 모습이 기억에서 점점 강해지는 거야. 그 옛날, 긴 머리를 흩날리며 절벽 아래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 보고 있다가 환한 미소로 돌아보던 월아 낭자의 아름다운 자태. 건강하고 늠름한 모습의 핸섬가이 사달추수. 황구와 백구, 이 두 마리의 개는 이미 마음 속에는 천년 전의 사람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거지.
절벽에 다다랐을 때 멀리 서로의 모습을 확인했지. 전생에 만나던 장소에서 이렇게 다시 보게 되니 서로 얼마나 반가웠겠어.
“월아낭자!”
“사달추수님!”
둘은 이렇게 불렀는데, 사실 누가 들으면, “멍, 멍”하는 소리일 수밖에 없겠지. 애틋한 목소리가 고고한 달빛에 스며들었지. 둘은 절벽 끝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어.
절벽 아래엔 낙동강 물이 달빛을 받아 조용히 흐르고 있었어.
황구와 백구가 된 사달추수와 월아낭자는 그후로도 매일 밤마다 서로 산에 올라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았다는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