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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가을
기다림
by
디오니
Oct 14.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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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무척 조심스러운 잔발걸음소리와 문 여닫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 가을이 왔지.
산이 궁금하고 내 자리 그곳에 얼굴 내밀고 있을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냥 있을 수 없겠지.
피곤하지도 않은지.
남편은 산으로 갔을 것이다.
이산 저산 다니며 솔잎을 이불 삼아 덮고 있을 아이들을 깨우러 갔을 것이다.
누우면 좀체 일어나지 않고 머리만 대면 금세 잘도 잠드는 남편이 유일하게 아침 부지런을 떨 때가 가을이다.
휴대폰의 동영상도 심마니 아저씨위주로 보는 남자다.
남편의 유일한 취미다.
산으로 들로 나가면 좀체 집으로 전화도 하지 않는다.
그냥 집에 문을 열고 들어와야 왔구나 싶다.
산을 헤집고 다닐 거면 제발 물이라도 챙겨가고 김밥이라도 사가라고.... 그리고 어느 산으로 갔는지 제발
문자라도 남겨놓고 가라고 아주 긴 세월 잔소리를 해도 통하지 않는다.
집안일도 성질 급한 놈이 하게 되더라고 버릇 고치려고 올 때까지 전화도 안 하고 버티다가, 어디 산에 처박힌 건 아닌지, 혼자 다니니 어디 발을 헛디뎌 쓰러져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결국 내가 먼저 전화를 해서 확인을 한다.
그럼 남편은 매번 같은 대답이다.
금방 갈 거야. 남편의 금방은 최소 2시간은 넘는다.
언제부턴가 이젠 나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남편은 속이 타지 않는다. 자기는 산속에서 즐겁게 솔잎을 뒤지고 다니고 있고 자기가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까. 혼자 몇 시간씩 산을 돌아다니는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내 몫이다.
걱정해 달라고 하지 않았으니 걱정했다고 화도 내지 말아야지 다짐한다.
걱정을 '샘솟는 화'로 키우지 말아야지.
그런데 오늘은 휴대폰도 두고 갔다.
세시가 넘도록 소식도 없다.
운동화를 신고 가을이 빛나는 거리로 나섰다.
빛에 물들어 빛나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도열해 있는 거리를 한 시간 남짓 걸었다.
역시 물드는 가을을 걷는 그 시간만큼은 나의 시간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도서관에 정착한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남편이다. 집에 돌아왔단 증거다.
화가 난다.
전화를 받지 않았더니 작은 딸 영이가 문자를 보내왔다.
'엄마 어디신가요?'
'도서관'
'혹시 도착 예정시간이 언제쯤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작은 딸 때문에 웃는다.
가끔 요렇게 귀엽게 문자를 보낸다.
'당신의 남편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표현력 보소.
'그래서 언제쯤 오시나요? 남편이 송이 따왔습니다'
정말 딸의 문자내용이 너무 귀여워 집에 가고 싶어진다.
가을과
나란히 동행하며 집으로 돌아가자
무사히 돌아와서 감사하다.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가을이면 남편의 송이를 먹고 자라왔다.
등산이 취미인 남편은 산의 곳곳을 안다.
말이 없는 남편은 말없이 형형색색으로 아울러 품어주는 산을 사랑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송이를 다듬고 주욱 찢고 기름장을 만들어 남편의 선물을 아이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등산로 옆 소나무 밑에 솔잎을 봉긋 뒤집어쓰고 었었다고 남편은 뿌듯해할 것이다.
집에 돌아가면 내가 할 잔소리가 너무 뻔해서 헛웃음이 난다.
'이젠 폰도 두고 다니냐'.
하지 말까?
하지 말자. '오늘 가을 산에 가보니 산은 잘 있었던 거 같아?'하고 물어보자.
그리고 웃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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