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공화국
-딴 말 말고 자격증-
이탈리아 바리스타 코스를 문의할 때, 가장 신경 쓴 건 SCA 자격증(Specialty Coffee Association에서 인정하는 국제공인 자격증)이었다. 아카데미 홈페이지에는 매일 코스가 끝날 때마다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수 있지만 미리 신청해야 한다고 안내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메일로 바리스타 자격증에 응시하고 싶다고 문의를 남겼다. 돌아오는 답변은 학원에 가서 직접 신청하면 된다고 했다. 홈페이지 안내와 달라서 불안했다. 학원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문의한 것도 자격증에 관한 것이었다. 강사의 대답은 더욱더 유연했다. 그날 코스를 마치고 신청해도 된다고 했다. 이 코스를 듣는 것도 자격증 때문에 듣는 나로서는 그들의 태평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토록 집착한 자격증 시험은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바리스타 과정 이틀째, 바리스타 수업을 맡은 CEO로 추정되는 강사와 상의한 후 내린 결론이었다. 바리스타 자격증도 초급, 중급, 고급 과정이 있는데, 당일 바리스타 심화과정을 배운 걸로는 중급자격증은 도전할 실력이 안 되었다. 초급은 도전 가능하겠지만, 수료증과 큰 차이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최근에 일주일 커피코스의 과정을 정리해 보면서 그 배움이 얼마나 일종의 구색맞춤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받은 자료를 복습해 보면서 새로 알게 된 지식이 거의 90%에 달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커피코스를 하는 동안에도 그 후에도 제대로 복습해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이라 몇 퍼센트의 지식의 받아들였을지도 이제는 의문이 든다.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으로 건너온 파블로 부부가 모든 수업을 녹음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처음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모국어로 진행되는 수업도 녹음해서 다시 되새기는 사람들이 있는데, 정작 나는 그 생각을 못했다.
처음부터 내다본 것은, 커피에 관한 지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직접 받아온 '바리스타 자격증', 그 형식이었다. 그 자격증을 보게 될 카페 고용주의 평가만 생각했다. 커피에 관한 배움을 먼저 생각했다면, 첫날부터 녹음기를 켜고 화면에 띄워진 자료사진을 이리저리 찍었을 것이다.
알맹이보다 껍데기를 얻는데 급급하게 살았다. 껍데기를 얻기 위해서는 알맹이 정도는 미련 없이 버릴 때도 있었다. 독일어능력시험을 합격해도 그 급에 맞는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시험을 합격하는데 목표를 두고 최대한 적은 시간을 투자하고 턱걸이로 합격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수능을 치르던 고3이 나온다. 국어 다음으로 재미있는 과목이 영어였고, 그만큼 모의고사 성적도 받쳐줬다. 하지만 어느 날 영어선생님이 지문 읽기를 시켰을 때, 귓가를 울리던 형편없는 발음과 다소 실망한 듯한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실제 실력보단 점수를 얼마나 받는가 등급은 어떤가 가 먼저였다. 제대로 공부할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나는 국어와 영어를 정말 잘했다. 수능에서 결국 영어는 3등급을 받았다. 그나마 문법과 듣기는 포기하고 읽기로 밀어붙여 받아낸 최고의 등급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마음을 먹고 그랬던 건 아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중간고사를 앞은 중학교 2학년의 학생과 만난다. 다음날이 시험인데, 저녁 9시에 겨우 공부를 시작했다. 마음은 불안하고 시간은 없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 국어부터 시작한다. 더없이 게으르지만 더 없는 완벽을 추구하던 학생은 은유법과 같은 작은 부분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고 예문을 보고 이해한 뒤 그 정의를 읽고 쓰고 외운다. 결국 다른 두 과목은 공부를 못하고 망쳤다. 다행히 국어성적은 잘 나왔다. 돌이켜보니 학생은 너무 허무해졌다. 그토록 완벽하게 해 놓은 국어공부를 정작 시험지에서는 제대로 발휘할 수가 없었다. 4지선다의 객관식 문제에서는 어젯밤 늦게까지 공부한 은유법, 대조법에 대한 자세하고 정확한 지식은 필요 없었다. 대략 슬쩍 읽고 개념만 파악해도 충분히 답을 고를 수 있는 문제였다.
그렇게 시작된 '설렁설렁'주의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4지선다가 없는 이탈리아의 어느 아카데미에서 그렇게 일주일 동안 잠시 스쳐가는 조각조각의 기억들만 안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커피에 대한 지식은 막연하게 머릿속에서 맴돌고, 그 와중에 바리스타로 취업을 했으니 그 값어치를 충분히 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제야 완벽한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