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어의 곤란함과 정신승리의 시도
어떤 분야에든 마스터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바리스타 세계에도 마스터들을 위한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이 있다. 매년 주최국이 바뀌며 세계 각국에서 재능 있는 바리스타가 출전한다는 점에서 올림픽과 흡사하다. 룰의 골자는 15분 동안 4개의 에스프레소, 4개의 우유 베이스 음료, 4개의 시그니처 음료를 만들어서 심사위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맛, 청결도, 창의성, 기술 숙련도, 및 전반적인 프레젠테이션 모두 엄격하게 평가한다. 하지만 이 큰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라테아트이다. 어떻게 거품을 낸 우유로 이토록 섬세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싶은 아트가 단 15분 안에 여러 개 완성된다.
-우유 스티밍(Steaming)-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라는 속담처럼, 많은 시작은 생각보다 볼품없는 것의 반복이다. 그래서 은밀하고 위대하다. 우유 스티밍이 바로 그렇다. 커피숍을 집 드나들듯이 다니지만 스티밍을 잘하는 바리스타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커피맛을 조금 알고 난 후부터는 스티밍 소리만 들어도 숙련된 솜씨인지 아닌지 판단이 가능했다. 흔히 카페에서 보는 에스프레소 머신 한 귀퉁이에 달린 얇은 노즐 같은 스팀피쳐는 보기보다 힘이 강력하다. 항상 달궈진 쇠에 실수로 살이 닿으면 가벼운 화상이 남는다. 스티밍 래퍼를 돌리는 순간 무서운 기세로 나오는 달궈진 공기에 우유는 쇳소리를 내며 부글부글 끓어대기 십상이다. 뜨겁게 끓어버린 우유는 원래의 맛을 잃어버린 채 비린내를 풍긴다. 과유불급이다. 그렇게 나온 카페라테는 말할 것도 없이 뜨겁기만 할 뿐 맛이 없다.
초심자들에게 스티밍을 위한 우유는 낭비다. 차가운 물에 주방세제 일명 퐁퐁을 살짝 섞어주면 더할 나위 없는 대체제가 된다. 호주에서도 바리스타 챔피언 출신 사장님은 영업이 끝난 후에 그렇게 연습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다. 학원에서도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밀크저그에 스팀노즐을 넣는 위치를 배웠다. 노즐을 두는 위치는 일단 살짝 나온 밀크저그의 주둥이에 노즐을 걸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렇게 하면 노즐도 어느 정도 안정적으로 고정이 된다. 기울어진 노즐을 정 중앙에서 오른쪽으로 2/3 지점의 두면 완벽한 출발지점이 된다. 노즐의 끝은 우유의 표면에서 0.5~1 cm 아래로 살짝 들어가면 충분하다. 첫 번째는 스트레칭(Stretching) 과정이라는데, 스팀피처를 밀크저그로 펼쳐둔다는 의미에서 쓰는 게 아닐까 짐작해 본다. 우유 속으로 공기를 주입해서 거품을 만드는 단계이다. 우유 표면과 공기 사이에 살짝 걸친 노즐이 '피쉭~' 이런 소리를 낸다면 어느 정도 성공적인 셈이다. 이 과정은 가게에서 쓰는 에스프레소 머신 기준으로 1-3초 이내에 끝난다. 신속하게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야 한다.
텍스처링(Texturing) 과정은 말 그대로 거품의 질감을 다듬는 과정이다. 이때 공기밖에 살짝 노출된 노즐은 살짝, 그렇지만 완전히 우유 안으로 더 내려야 한다. 그 차이는 섬세해서 큰 저그가 아닌 이상 그 움직임이 삼자의 입장에서 크게 관찰될 정도는 아니다. 이때부터는 우유가 소용돌이를 그리며 회전해야 한다. 거품을 서로 으깨어 가며, 벨벳 같은 부드러운 크림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우유의 온도는 섭씨 55도에서 65도가 이상적이다. 그 이상 올라가면 우유의 단백질의 구조에 변형이 와서 맛이 변하고 비린내가 나기도 한다.
이제 라테아트를 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에스프레소가 담긴 커피잔을 기울여 잡는다. 잔의 끝, 입이 닿는 곳에 손이 닿지 않도록 커피잔 아래 혹은 손잡이를 잡도록 한다. 밀크저그도 뜨겁기 때문에 손잡이 끝만 잡고 90도의 각도로 기울인 잔의 정 중앙에 우유를 붓는다. 에스프레소와 부드럽게 섞이도록 소용돌이를 그려가며 부어주어도 좋다. 컵의 절반까지 채웠을 때, 강사가 'Stop!"이라고 외친다. 밀크저그의 주둥이를 잔에다가 갖다 대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잔이 찰수록 기울어진 컵을 바로 세우되, 잔이 가득 차는 순간에 기울기는 0으로 수렴한다. 우유를 너무 높게 붓거나 그 흐름이 적으면 라뗴아트가 없는 갈색 표면으로 끝난다. 컵을 기울이면서 갈색과 흰색의 '대조'를 통한 라테아트를 완성할 수 있다.
먼저는 이 '대조'를 연습했다.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은 '동그라미' , 그다음이 '하트'이다. 하트는 동그라미에서 끝을 살짝 길게 빼주면 완성된다. 이때, 하트의 뾰족한 끝이 완성되도록 우유의 흐름이 점점 적어지고 잔의 기울기도 완만해져야 한다. 다음으로 도전할 수 있는 게 로제타(Rosetta)_여러 개의 하트를 그린 아트_ 다음은 튤립, 학 등 제한은 없다. 초심자들은 동그라미, 혹은 어쩌다 실수로 하트를 완성하는 게 전부였다. 누군가 하트를 완성하면 옆에서 지켜보던 학생들이 탄성을 질렀다. 이전에 바리스타로 일했던 경험을 복기하며 노력했지만 수많은 시도 중 하트를 완성한 건 한 번이 다였다. 아마도 이때, SCA 자격증을 포기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힌 듯하다.
시범을 보여주는 강사가 여러 개의 라테아트를 만들어 선보였다. 이제 한걸음 뗀 입문자들은 사진과 영상을 남기며, 그의 재능을 구경했다. 전문가는 달랐다.
-고립어의 서글픔-
이날은 저녁 7시 반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진이 다 빠진다. 저녁 8시인가 피렌체 시티에서 같이 모여서 놀기로 했다고 파블로가 알려준다. 영어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살짝 소외감을 느끼던 참에 파블로 부부가 이래저래 챙겨 주었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 가고 싶기도 하지만 갈 수없었다. 하루종일 영어로 하는 수업도 60-80 퍼센의 이해도를 오가며 리스닝의 한계를 체험하고 있었다. 쉬는 시간에 모여서 농담 섞인 스몰톡을 시작하면 더 알아듣기 힘들어졌다. 계속해서 되물을 수도 없는 일, 어느 순간 조용히 웃는 동양인이 되어갔다. 어찌하다 보니 수업보다 스몰톡이 더 힘들어진다. 그런데 스몰톡과 농담으로만 가득한 친목모임에 갔다가는 파김치가 될게 눈에 선했다. 아니 그들과 어울리며 그 자리에 녹아들 수나 있을까...
냉정한 뇌는 더 이상의 인풋(Input)을 단호히 거절한 채 'No!'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 모든 대화가 텍스트로도 동시에 나타난다면 90퍼센트 이상은 이해가 가능할 텐데... 10퍼센트는 모르는 단어들이 되겠다. 몰라도 맥락상 추측 가능한 단어가 많기 때문에 퍼센티지를 조금만 잡았다. 정신승리가 되지 않는다. 또다시 시도해 본다.
'너희들은 원어민이잖아, 아님 게르만어가 모국어 뿌리잖아. 나 같은 고립어랑 같겠냐고!!!'
자격지심에 마음속으로 크게 항변해 보아도 역시 위로가 되지 않는다.
놀고 싶은 마음반, 쉬고 싶은 마음반 그렇게 씁쓸한 마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가지 않는 것과 사실상 갈 수 없는 것의 그 간극이 마음 한편을 살짝 눌러왔다. 그럴수록 더욱 서둘러 안전지대로 복귀했다.
어느덧 커피코스의 절반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