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우리 결혼한 호텔 리모델링했던데? 결혼할 때 거기 뭐 쿠폰 받지 않았었나? 아직 사용 가능한지 확인해 봐”
“아, 호텔 1층 식당 말하는 거지? 응, 알았어. 내일 출근하면 연락해 볼게. 그러고 보니 우리 거기서 상견례했었지?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ㅎ”
“...”
“... 그래.. 그때... 그랬었지,.. 휴...”
그렇다. 세월이 지나면 힘든 일도 추억이 되는 법이지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났다고 힘들었던 일이 힘들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스드메’를 예약하고 나자 잠깐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식장도 예약했고, 프러포즈도 했고, 스드메까지 다했으면 일단 급한 건 끝난 것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었다. 결혼 준비는 이제 시작이었다. 물론 대충 알고는 있었다. 신랑 예복, 신랑·신부와 혼주 한복, 신혼여행 준비, 예물, 예단 등 아직도 정해야 할 목록이 많다는 것을. 그래도 (순진하던 시절의) 내 생각에 그렇게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 우리네 인생이 늘 그렇듯 - 문제는 전혀 생각지 못한 곳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체감상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지만 아직도 계절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식장 예약을 필두로 여름의 초입부터 결혼 준비를 시작했으니 아직 채 2달도 지나지 않은 셈이다. 한동안 데이트 준비 필수품이던 핸드폰과 노트북을 손에서 내려놓은 채 오래간만에 여유 있게 담소를 나누던 중, 여자친구가 말했다.
“오빠, 우리 상견례는 언제 해?”
“상견.. 례?" 내가 되물었다.
“응. 이제 식장도 잡았고, 스드메도 계약했고, 양가 만나는 게 순서 아냐? 원칙만 따지면 상견례가 먼저긴 하지만”
“아, 그렇지.. 그런데 좀 급하지 않아? 양가에 인사 갔던 게 두어 달 달 전인데.. 아직 결혼까지 8개월도 넘게 남았잖아?”
“그냥 엄마 아빠도 언제 하는지 물어보시고.. 난 할 수 있는 건 빨리 끝내고 싶어. 안 그래도 준비할 것도 많은데”
“ 어... 응...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려 볼게”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상견례 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양가에 번갈아 인사를 드리며 사실상 결혼 허락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형식적인 만남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상견례? 뭐 벌써부터 상견례를 해?”
집에 돌아가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처음 돌아온 어머니의 반응이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아직 결혼이 8개월 가까이 남았는데 뭐가 그리 급하냐는 말을 덧붙이며.
늦은 밤, 여자친구와 통화하며 들은 말을 사실대로 전했다. 우리 부모님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가을이나 연말쯤 다시 날 잡는 건 어떠냐고. 잠시 동안의 침묵. 눈치 좀 있는 남자들은 알 것이다. 이 침묵이 단순히 장고(長考)가 필요해서 생긴 공백이 아니란 것을. 화가 난 건지, 어처구니없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숨소리 만으로도 그녀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다는 것을 본능적을 느낄 수 있었다.
다행히 다음날도 휴일이라 더 큰 오해가 생기기 전에 아침 일찍 황급히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빗나가지 않는다. 한여름의 에어컨 바람보다, 테이블 위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서늘한 표정과 말투로 그녀가 말을 꺼냈다. 부모님께서 상견례를 하지 않으려는 이유가 뭔지, 너(대화상 호칭은 오빠였지만 이 편이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는 부모님 설득도 안 해보고 바로 포기한 게 맞는지.
100% 예상한 질문을 받아도 대답이 궁할 때가 있다. 별생각 없이 입사 지원한 회사에서 지원동기를 물을 때처럼. 더듬더듬 대며 대답했다. 부모님께선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신다, 8월이면 아직 날도 덥고 우리 형 결혼 때도 2,3개월 전쯤 상견례를 했었다, 그리고 주변에 결혼하는 커플들 봐도 이렇게 일찍은 잘 안 하는 것 같다, 어차피 어머니끼리 아는 사이라 안면 틀 것도 없는데 뭘 그리 일찍 하냐 신다 등등.
하지만 예상대로 어느 이유 하나도 그녀를 설득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오히려 조목조목 논리적인 반박만 들었을 뿐이다. 형을 비롯해서 남들이 상견례를 언제 했는지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 어머니끼리 알던 사이면 오히려 보는데 부담 없는 거 아니냐, 설령 상견례가 본인들이 생각하는 시점보다 더 빠르다 하더라도 상대측에서 먼저 제안했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미루는 건 실례 아니냐...
(참고로 두 어머니께선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결혼 준비 이전에도 서로 알고 계시던 사이였다. 애초에 여자친구를 만난 것 자체가, 두 분의 공(功) 이기도 했다. 과년한 아들딸이 마침 만나는 사람이 없어 각자 적당한 상대를 소개해줄 것을 지인에게 부탁했는데, 우리 둘이 연결된 것이다. 사실 말이 소개팅이지 거의 맞선급(?) 만남인 셈이었고, 그래서 결혼 준비 속도가 더 빨랐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일은 집에 돌아가 이번엔 부모님을 설득하는 일. 발걸음이 무거웠다. 얼핏 생각하면 날짜 하나 조정하는 것이 뭐 그리 어려울까마는, 내 본능이 말해주고 있었다. 앞으로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