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시절 이야기 중 아내가 한 말이다. 아무나 받아주지 않아서 시험 보고 들어간다는 강남의 그 학원이다.
"오빠는 재수할 생각 안 해봤어?" 이어지는 아내의 물음에,
"응? 내가 왜? 굳이?"라고 대답했다.
나름 'SKY'에서도 (문과 중엔) 탑이라는 상경대학에 붙었는데 웬 재수냐고 말할 뻔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도 명문대 합격 후 재수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현재 친하게 지내는 과 동기중 태반이 와이프와 같은 재수학원 출신인데, 서울 상위권 대학에 붙어놓고도 재수를 감행하여 결국 나와 만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그들 모두 강남 출신이다. 심지어 한 명은 나와 같이 대학생활을 하는 와중에 '반수'를 선택하여 더 높은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반면, 고등학교 친구들은 대부분 첫 수능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했다. 목표를 100% 달성하진 못했어도 '이 정도면 괜찮지', '한 번 더 했다가 이것도 못하면 어떡하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가서 더 잘하면 되지'라고 서로 위로했던 것도 같고. 아직 명문으로 자리잡지 못한 신생 외고인 탓에, 선생님들조차도 진학률을 고려하여 재수 대신 일단 어디든 입학하길 추천했다.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를 낸 아이들 사이에서 선천적 지능 같은, 소위 '포텐'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내는 그 이유를 강남 특유의 다 같이 노력하는 분위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 노력의 방법이 고지식하리만큼 한결같이 공부로 귀결된다는 면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뺑뺑이' 때문에 8학군 내 비선호 학교로 배정받았음에도 전체적으로 공부하는 분위기였단다. 소위 '일진'으로 분류되는 아이들조차 시험기간에 벼락치기나마 열심히 공부했다고. 그 덕인지 웬만하면 서울에 있는 중위권 대학이나마 합격하고, 자기 같은 범생이(?)는 더 자극받아 재수, 삼수까지 해가며 입시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한다(그럼에도 내가 더 대학을 '잘' 간 사실은우리 사이에 금기시되는 주제다).
강남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집착은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한 듯하다.마치 공부 아니면 할 게 뭐 있냐고 말하는 듯.아내 주변에 일확천금을 노리고 투기를 한다든가, 사업하는 친구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문대학원이나 자격증 시험을 준비해서 전문직이 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학위를 밟고 있다고 했다. 하다못해 일반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은 사내 장학 프로그램에 합격하여 주재원 생활 내지는 회사 지원으로 유학 중이다. 나의 '강남 친구들'이 걷고 있는 루트와 놀랄 만큼 비슷하다.
이러한 공부로 승부(?)를 보려는 분위기가 자리 잡은 이유를 한 가지로 단정 짓긴 어렵다. 학군지를 찾아올 정도로 지극정성인 부모의 의지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주변에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아서 일수도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분위기 하나를 위해 비싼 집값을 감수하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는 것.
나에게 이 '분위기 값'으로만 거액을 치를 의사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일단 내 자식이 머리가 좋은지 먼저 확인해 보는 게 우선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