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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눅눅한과자 Jun 18. 2024

매수자인데 왜 '을(乙)' 같지?(1)

곧 품절됩니다



  

 결혼준비 중 아내에게 '명품백'을 선물하면서 결심했다. 이제 큰돈을 소비하며 절대 '을(乙) 질'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소비자가 왕인 세상 아닌가. 그 비싼 걸 사면서 줄 서고, 기다리고, '오픈런' 하는 것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 결심은 정확히 5년 만에 깨졌다. 그것도 명품백 따위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싼 재화(財貨)인 강남의 집을 사면서.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4년간 공부하며 다양한 이론을 배웠다. 가격 탄력성이니, 불완전경쟁시장이니 하는 개념들을 통해 무조건 구매자가 갑(甲)의 위치가 아닌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억'소리 나는 구매에 찬밥신세가 되는 경험을 할 줄이야.


  신혼집을 구할 때까진 (내 딴엔) 상식적인 거래가 이루어졌다. 공인중개사를 방문하고, 여러 집을 구경하고, 개중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 보증금을 흥정하고, 그러다가 합의가 이루어져 계약을 하고 이사를 갔다. 물론 임대인이 수리를 안 해주니, 중개사가 중개보수를 과하게 받느니 하는 문제로 작게 실랑이를 벌인적은 있지만 적어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때 까진 우리에게 주도권이 있었다.


 아내의 등쌀(?)을 이기지 못하고 강남으로 전셋집을 옮길 때, 맛보기나마 다른 세상을 경험했다. 집을 구하던 중, 20여 년째 처가와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는 단골 중개사에게 연락이 왔다. 30년도 넘은 낡은 아파트에서 이만한 상태 좋은 집 만나기도 어려운데 가격도 저렴하단다. 부랴부랴 아내와 퇴근 후 방문해 보니 과연 이만한 곳이 없겠다 싶었다. 하지만 구축이어도 강남은 강남. 부담스러운 보증금 규모에 조금만 더 고민해 보겠다는 우리에게 그가 말했다. 집주인과의 친분덕에 내일 오전까지는 기다려 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힘들다고.


 우린 급히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계약하기로 결정은 내렸지만 여전히 금액이 부담스러웠다. 이미 다른 매물 대비 저렴한 금액인 건 알지만, 조금이나마 더 '네고'가 되지 않는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채 5분도 되지 않아 중개사 아저씨에게 온 답변. "임대인 분이 3천만 원 깎아주신대요".


 그 자리에서 우린 가계약금을 넣었다. 집을 구경한 지 한 시간 안에 벌어진 일이다. 신혼집을 구할 때 천만 원 가지고 이틀을 실랑이하던 일을 생각하면 이게 웬 횡재냐 싶었다. 

 

 좋은 집을 구했다는 생각에 한껏 들떴지만, 돌이켜보니 우리는 한순간도 협상력을 가진 적이 없었다. '타임 리미트'도 우리에게만 제시되었으며, 임차 보증금도 양측의 협상이 아닌 집주인의 일방적인 호의에 의해 할인된 것이었다. 


 물론 꼭 강남이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귀한 부동산 매물에 수요자가 몰리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니까. 어쨌거나 이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모로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기분 좋게 마무리된 셈이다. 하지만 몇 년 후, 집을 매매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돈을 싸들고(?) 제대로 '을질' 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구축 아파트의 최대 매력이라면 자연을 벗한 환경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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