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나는 정말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영화과를 다니는 학생들은 같은 고민이 있는데 바로 제작비를 마련하는 일이다.
요즘은 단편영화를 제작지원 하는 프로그램도 많고 다양해졌다고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도 아니고
내가 대학생 때는 그나마 이런 프로그램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니 3, 4학년 때 제대로 된 단편을 찍을 생각이라면 -사실 모두가 이 생각을 한다- 큰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엄마 찬스가 없다면 아르바이트는 일상이고 의무였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많은 아르바이트르 했는지 상상도 안된다.
그때 내가 하던 아르바이트 중에 이전 전공을 살려서 아이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는 수업을 했었다.
그 중 어떤 남자아이가 유난히 장난을 많이 쳤다. 정말 장난꾸러기 대장이었다.
어느 날 수업을 하러 갔는데 그 아이를 데려다주는 아이 엄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가 싸하다고 느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고 그 아이는 그날도 어김없이 책상 위로 올라가고 소리를 지르고 장난을 쳤다.
지금 내가 과하게 기억하는 걸 수도 있지만
내가 수업시간에 아이 이름을 엄청 부른 것은 맞으니 그런 것 같다.
그때였다.
아이 엄마가 교실 문을 벌컥 열더니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왜 우리 애한테만 뭐라고 하냐, 수업시간애 애 이름을 도대체 몇 번을 부르는 거냐.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난주에 이미 화가 났던 모양이다.
밖에서 듣는데 자꾸 아들의 이름의 나오니 언짢았던 거다.
그래서 오늘 걸리기만 해 봐라 작정을 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아들 이름을 또 부르자 말 그대로 뚜껑이 열린 것이다.
"제가 아드님 이름을 부르는 걸 들으셨으면 아드님이 수업에 불가능하게 소리 지르는 소리도 들으셨겠네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센터 직원의 중재에 따라
나는 사과를 했고 이후에도 계속되는 아이 엄마의 폭언을 조금 더 들어줘야 했다.
그렇게 그날 수업은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집에 가는 버스에 올랐다.
귀갓길 두 시간, 그렇게 울었다.
너무 무섭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망의 상대가 원망이 안되니 괜히 부모님이 원망스럽고 괜히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내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식사도 제때 못해 그 당시 예감이라는 과자가 주식이었던 나의 처지가, 당장 때려치우고 싶지만 때려치우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나를 더 초라하게 만들어 서러웠다.
정말 버스 안에서 다른 사람들 눈치도 못 본채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집에 거의 다 와가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 분명 양쪽 다 화가 났다면 누군가는 잘못한 것이고 누군가는 사과를 해야할텐데...
돈 주는 그 사람과 나 누가 사과해야 할까...
그래... 돈 주는 사람이 옳다. 그러니 아이 엄마가 옳은 거다'
누군가는 비겁한 타협이고
자기 최면이라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는 돈을 주는 사람은 부당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돈을 주니까.
그 다음 주 나는 그 수업에 다시 갔고 끝까지 수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무수히 경험한 부당함들 앞에서는 나는 되뇌었다.
'그래 돈 주는 사람은 옳다.'
그런데 며칠 전 우리 큰 아이가 비슷한 말을 했다.
지난주 아이는 국제 포럼 청소년위원자격으로 외국에 다녀왔다.
교육청에서 전액을 지원받아 간 거라 개인 지출은 하나도 없는 출국이었다.
당연히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많았다.
그러다 어떤 부당함을 이야기하며
'나는 일하러 온 거니까. 그 페이로 이 모든 경비를 지원받았으니 이 정도 부당함은 참아야지'
그렇게 혼자 되뇌었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니 훨씬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데 좀 서글펐다.
그때 그날, 귀갓길 버스 안에 도로 들어간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유쾌하게 잘 이겨낸 스스로가 대견하다고 한 말이었지만
부당함을 돈으로 합리화하며 스스로 살기를 선택한 아이가 서글펐다.
딸은
너는 투사로 살지 않았으면
너는 그냥 평생 적당하기만 했으면
너는 시련 따위
너는 거창한 승리를 위한 거듭되는 노력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시시한 조연으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