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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하는 이모씨 Aug 06. 2023

w-log. 연극영화과 불합격자들에게

수년간 입시심사를 하며 그동안 만난 학생을 어림해 보니 3천 명은 훌쩍 넘는다.

심사했던 모 대학의 한해 지원생수만도 1600여 명이 넘으니 당연한 수치다.


입시심사를 할 때 몇 가지 서약이 담긴 서약서에 사인을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내가 이 학교에 입시심사를 한다는 것을 발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헌데 그런 서약서에 사인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불편한 상황에 놓이고 싶지 않으니 당연히 말을 하지 않는다. 

허세가 될까봐 행여 엉뚱한 부탁이라도 받을까봐 어디에도 하지 못한 말을 해볼까 한다.   


심사를 하다 보면 별의별 학생들을 만난다. 

그만큼  불합격에도 별의별 이유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이 그 이유를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유를 안다면 같은 실수를 하지 않거나 그 부분을 보완할 텐데 오직 평가만 있는 입시에서는 반성과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불합격'을 받아 든 학생들은 그 별의별 이유만큼 다양한 성장이나 대응을 하지 못하고 똑같이 그저 절망만 한다. 

그래서 혹시나 입시를 준비하는 분들께 도움이 될까 싶어 그간 심사를 하면서 정말 붙잡고 말해주고 싶었던 것들을 몇 가지 적어보려고 한다. 



1. 당신의 불합격은 당신의 인생을 위한 축복이다. 


정말이지 이 길에 들어서면 안 되는 학생이 있다. 

안타깝지만 그 어떤 제출물에서도 재능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열정과 이 일을 하고 싶다는 결의는 삼국지 수준이다. 

정말 이런 학생이 있을까 싶지만 있다. 

왜냐하면 이런 학생들을 학원에서 절대 걸러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래~ 하면 된다는 희망으로 호구 삼는다.


어떤 해에 연기과 입시를 심사하는데 정말 어떤 면에서도 재능이 드러내지 않는 여학생이 있었다. 

면접을 보는 짧은 시간 그 학생을 판단하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 여학생은 그 시간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어떤 독백대사를 했는데 하도 소리가 작아서 한번 크게 소리를 질러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를 내보라고. 그런데 그 학생은 조금 내는 듯하다 말았다. 

그래서 일단 그 소리로 다시 한번 대사를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학생을 달래며 혹시 이 쪽 일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언니가 재능이 없는 것 같다고 반대했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학생의 면접을 마쳤다. 


나는 지극히 의도적으로 그 질문을 했다. 

학원에서는 해주지 않는 그 질문을 말이다. 


우리 쪽에서 부모님의 반대는 마치 드라마틱한 데뷔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처럼 오해를 하는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부모님들 대부분이 덮어놓고 반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반대를 한다? 그럼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학원은 지금도, 앞으로도 절대 해주지 않는다. 



2. 자기도 모르는 이유로 떨어진다. 


당연한 말인데 집필 시험지에 수험생은 이름을 쓰면 안 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겠지만 학원에서도 아마 가르칠 테고 무엇보다 집필고사를 볼 때 배포하는 수험생 유의사항에도 이름을 포함한 본인의 신상을 드러낼 어떠한 정보도 쓰지 말라고 친절히 안내되어 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이름을 써서 실격처리 당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고 여러 명이다. 


너무 긴장해서인지 시험지 제일 위에 당연하다는 듯 버젓이 이름을 쓴 학생도 있지만

000 힘내자!라고 쓴 학생도 있었고 

000을 자음모음 풀어서 쓴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의도적이라기보다는 글쓰기를 마친 후 낙서처럼 남기는 것 같다. 


이러면 0점이다. 집필한 글에 대해 평가 자체를 못 받고 불합격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불합격이유는 알 길이 없다. 다른 학교입시에서나 이듬해 입시에서 또 그럴까 봐 무서워 죽겠다.



3. 너를 위해 지금은 아니다. 


보통의 입시에서는 없는 일이지만 대학원입시에서는 아주 가끔 이런 경우도 있다. 

좋은 작가에게 필요한 것은 학교가 아니라 스스로 작업한 시간과 양이다. 

그런 차원에서 어떤 학생은 가능의 씨는 보이나 조금만 더 성실히 작업을 하고 온다면 

이 학교가 정말 큰 도움이 되겠다 하는 경우가 진짜로 있다. 

그래서 정말 응원하는 마음으로 불합격을 결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경우도 그 학생은 의중을 알리 없으니 아마도 절망할 수 있다. 

부디 그런 학생분들은 지금도 열심히 작업해 주길 바란다.  



4. 지피지기면 백전 백승이다. 


다른 분야와 달리 연극영화과들은 그 학교가 지향하는 학생들이 있더라.

내가 참여했던 모대학의 연기과는 말 그대로 외모가 굉장히 중요한 평가 항목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 같은 외부위원이 아닌 학교 전임교수님들은 수험생이 문을 열자마자 평가점수를 입력하기도 했다. 그 학생은 아직 입도 뻥끗하지 않았고 다만 문을 열고 들어서기만 했을 뿐이다. 

이런 경우 전임교수는 최하위점수를 준다. 나 같은 외부위원이 행여라도 좋은 점수를 줘서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학생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지만 가만히 생각하면 그럴 일이 아니다. 

그 학교는 이미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같은 입장을 고수한 학교이다. 실제로 그 학교에서 배출한 스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 본인이 외모보다는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다면 애초부터 그 학교를 안 보는 게 맞다. 

적지 않은 전형료를 내고 굳이 탈락의 고배로 배를 채울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조건 예쁘고 잘 생겨야 하냐고 분을 낼 수 있지만 외모가 중요하다는 것은 예뻐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외적인 특징과 매력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일은 거절의 연속이다. 

적을 정확히 알고 보니 거절이 불 보듯 뻔하다면 스스로의 자존감을 위해 비켜가기를 권하고 싶다. 


 

올해도 입시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꼭 말하고 싶다. 

나뿐 아니라 입시를 20년이 넘게 해 오신 교수님들도 정말 입시에 진심이시라는 사실이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학교의 교수님들은 다 같은 마음과 태도셨다. 

여러분의 집필고사 답안지를 얼마나 열심히 읽으시고 하나하나 기억을 하시는지 곁에서 보면서 나 스스로 입시테러피가 될 지경이었다. 

나도 저렇게 귀하게 뽑혔구나. 
내가 운이라고 치부했던 것들이
저분들의 진심이었구나. 


올해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겠지만 알아주길 바란다. 

그 모든 것은 이 일을 정말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누군가의 진심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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