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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셔레이드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by 영화하는 이모씨

셔레이드가 작가가 심어놓은 보물이라니...

나는 여전히 영화를 보면서 비밀스러운 설정들을 발견하고 그걸 통해 영화를 더 다양한 충위들로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여전히 재미있고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옛날에 봤던 제목도 생각 안 나는 영화를 떠올려보면.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그저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그녀의 일상 속에서 지나치는 나무들, 꽃들은 점점 시들어가고 말라죽어간다.
그러더니 그녀는 문득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크게 놀라지 않고 그녀의 죽음에 고개를 끄덕인다.


또 다른 영화도 있다.


남자가 일상을 살아간다. 그에게 다소 부당한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지만 그는 크게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는 그의 삶을 보여주는 컷들 사이에 어디에 있는 나무인지도 알 수 없는 느티나무 컷들이 불규칙적으로 끼워 넣었다. 그는 사무실에 있는데 불현듯 카메라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느티나무를 보여준다. 세찬바람에 미친 듯이 휘날리는 느티나무를 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아무 표현을 하지 않는 그의 심경에 엄청난 소용돌이가 치고 있음을 느낀다.


위 장면들은 주변 식물들을 인물의 내면을 외면화하는 소재로 활용한 셔레이드이다.

주인공이 아무 말이 없었어도, 힘들어 죽겠다고 꺼이꺼이 울지 않았어도 그들의 심경이 말라비틀어져 간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씨네 필까지는 아니라도 성실한 영화 학도를 자처하던 때 나는 저런 영화를 보면서 서사와 아무 상관도 없는 저 컷들에서 서사를 뒷받침하는 강력한 무언가를 읽어내는 나 자신에게 완전히 반해버렸었다.ㅋ

그러니 나를 그렇게 멋진 인간으로 만들 보물을 숨겨놓은 감독들에게는 칭송을 마지않았다.


그런데 과연 요즘 관객도 그걸 재밌어할까?


일단 이 셔레이드가 보이려면 물리적으로 컷이 어느 정도 길어야 한다.

2초 만에 넘어가는 컷에 셔레이드를 심는 것은 사실 의미가 없다.

그런데 편집호흡은 점점 빨라지고 관객들은 그런 속도감 있는 영상물을 선호한다.

훨씬 즉각적인 재미를 주는 요소에 반응한다.

화려한 cg화면이나 위트 있는 대사 등에 말이다.


그렇다면 아주 극단적으로 셔레이드는 어쩌면 이제 필요가 없다고까지 할 수 있다.

아무리 작가가 보물을 100캐럿 다이아몬드급으로 숨겨 놨다 한들 찾을만한 시간도 줄 수 없고 찾으려는 사람도 없다면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럼 작가들은 머릿속에서 셔레이드라는 말을 지워야 할까?

아니면 20년 전 영화를 배우던 그 시절의 셔레이드를 셔레이드라고 정의하고 그걸 실현하는 게 맞을까?


조심스럽지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셔레이드의 유통기한은 끝났다.




행여 이모가 굉장히 지적으로 영화를 소비하는 반면 일반관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오해 않기를 바란다. 언젠가도 말했지만 관객은 극장에 앉는 순간 25% 정도 머리가 똑똑해진다고 말한 로버트 맥기의 말에 완벽히 동의한다. (<시나리오 어떻게 쓸것인가> 로버트맥기作)

그리고 분명히 말했다. 소비지는 진화했다고!

훌륭한 작가들, 풍부한 콘텐츠들은 소비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요즘 소비자들이 즐기는 셔레이드는 어떻게 생겼고 뭐라고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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