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때, 어떤 리뷰어를 만나야 정말 내 작품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리뷰를 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다 쓸데없다.
물론 리뷰가 진짜 필요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니다.
진짜 필요할 때와 아닐 때를 구분할 자신이 없다면 나는 리뷰를 받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이토록 리뷰를 반대하는 이유는 이글을 읽고 있 당신은 스토리에서 만큼은 시작작가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기성작가들은 사실 리뷰를 잘 받지도, 부탁하지도 않는다.
자기 문제는 자기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작 작가들은 쉽게 멘붕에 빠지고 그 대안으로 리뷰를 떠올린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이 있다.
앞서 리뷰를 정의하면서도 적었듯이 리뷰는 주로 지인들을 활용하게 된다.
그런데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시작 작가의 지인들이라면 보통 그들도 초보다.
지인들 중에 저명한 작가나 스승님들이 있지만 어렵고 죄송스럽다는 핑계로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런 시작작가들이 또 다른 시작 작가에게 할 수 있는 리뷰는 거기서 거기다. 뭔가 전복적인 사고를 기대하지만 그런 시선을 가진 리뷰어는 거의 없다. 보고 있는 시선의 높이가 거기서 거기인데 그것도 부족해 과한 공감이나 성의 없는 독설까지 더해진다면 진짜 최악 오브 최악이다.
그럼 천신만고 끝에 저명한 작가님께 리뷰를 받았다고 치자.
시작 작가가 과연 그 말을 알아들을까?
나는 앞서 밝힌 저명한 감독님의 수업을 수년간 들으면서 내가 다 알아듣는 줄 알았다. 내 기준에 동문서답같은 말씀들에는 기를 쓰고 대들기도 했다. 그런데 10여년이 지난 지금, 비슷한 시기 감독이 된 언니와 그때 수업이야기를 다시 한다. 그리고 근 20년간 글을 쓰고 감독도 되어 보고 제작이 무산도 되어보니 이제야 알아듣겠다는 고백을 나눈다. 그리고 어쩌면 아직도 다 못 알아듣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그런거다.
나는 생굴을 못먹는다. 싱싱한 생굴 이 가득한 진수성찬은 컵라면 하나만 못한 것과 같다.
또 다른 이유는 작가는 자기 생각을 쏟아내는 사람이라 글에 대한 평가와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를 구분해내기 쉽지 않다.
글에 대한 지적을 받았을 뿐인데 마치 그동안 살아온 인생 전부가 부정당한 기분을 겪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랬다. 학부시절 수업시간에 선생님께 지적을 받았는데 그길로 화장실에 가서 학교가 떠내려가도록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미쳤지 하필 교수실 한가운데 있는 화장실이에서 그랬다니....싶지만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울고 나니 감정은 걷어지고 이야기를 위한 의견만 남는 건 절대 아니었다.
난 그 이후로 그 수업시간에 같이 있었던 모든 학생들 앞에서 기를 펴지 못 했으니까.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도 않는다.
뭐 얼마나 고민한 작품이라고, 뭐 얼마나 작가로 살아봤다고 존경하는 스승의 지적에 그렇게도 서러웠을까... 한 20년 후에는 오늘의 나도 그리 보이려나...
작가는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사람이다. 스스로를 천재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최상의 자기혐오의 롤러코스터위에서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냅둬도 알아서 탑승하고 어쩔 수 없이 울고 웃는다. 그런데 뭘 굳이 리뷰씩이나 받아 롤러코스터의 난이도를 높이려고 하냔 말이다.
리뷰를 받는 것도 결국 이야기를 잘 쓰고 싶어서이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쓰는 공장의 메인 기계인 ‘나’를 잘 돌아가게 해야 한다.
기름칠도 하고 부품도 갈아주고 관심과 애정으로 살펴줘야 고장 없이 굴러간다.
굳이 기름때를 묻히고 오물을 투척하지 말자.
인정하기 아프지만 리뷰가 쓸데없는 이유는 사실 작가에게 있다.
돈도 안받고 미완성한 이야기를 읽어주고 의견까지 주는 사람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가 빈 깡통이라도.
왜? 그런 사람한테 부탁을 한 것도 작가의 결정이니까 말이다.
물론 회사에서 작가의 동의 없이 리뷰어를 선정해 리뷰를 받아주는 일도 더러 있는데 그 리뷰어가 헛소리비난을 어떤 리뷰를 해도... 고마운 거다. 인정하기 싫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