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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Sep 05. 2022

그림이 잘 안 그려지는 날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유독 잘 안 그려지는 날이 있다.

선은 길을 잃은 채 계속 삐뚤뺴뚤 움직여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하면서

얼추 윤곽은 그려지는데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틀을 잡은 후  피그먼트 라이너로 드로잉을 할 때도 여간 찝찝한 게 아니다.

선을 덧대기만 하면 되는데도 삐딱하게 옆으로 나가기 일쑤다.  

'오늘 왜 이러지? 채색하면 괜찮을까?'

점점 그리기에 자신감이 없어지면서  물감과 붓을 꺼낸다.

역시나 채색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조색을 하면 할수록 내가 원하는 색이 나오기는커녕  점점 탁해진다.

붓칠을 할 때도 물 조절에 실패해 군데군데 얼룩이 나고

작품은 대상의 맑고 깨끗한 색감이 아닌 탁하고 지저분한 색으로 변모한다.


그림이 안 그려지는 이유는 하나다.

잡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때다.

머리를 비우고 집중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데

여러 잡생각이 방해하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겠는가?

마음이 불편하니 당연히 그림은 산으로 간다.

그럴 땐 정말 속상하다.


그림을 망치는 잡생각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최고봉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어제 00가 나하한테 소리를 질렀는데, 너무 억울해.',

'내가 없는 동안 ㅁㅁ가 없는 이야기까지 지어서 나를 험담했다는 데 어떻게 혼을 내주지?'

'ㅁㅁ와 ㅇㅇ가 작당해서 나를 따돌리는데, 나 왕따 당하면 어떡하지?'

이런 쓸모없는 생각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면서 거기에 매몰당하게 된다.

그러니 그림이 엉망진창이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나도 모르게 뾰루지가 하나둘씩 생기는 것처럼

불안, 분노, 초조 등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무겁게 할 때는

과감히 붓을 내려놓는다.

이름 모를 가수의 보사노바 음악을 듣거나

커피 대신 홍차를 마시면서 밖을 멍하니 쳐다본다.

'주용아, 지금 검은 생각이 너를 탁하게 만들려고 하는 거야.'

라며 내게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기도를 한다.

 

그리고 다시 붓을 든다.

색을 입힐 대상을 보고 의도적으로 조금은 과하게 밝고 투명한 색을 입히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작품성을 떠나 밝고 따뜻하다.


그림이 안 그려지는 날처럼 ,

인간관계에서의 회의감, 금전적인 문제, 자녀와의 다툼 등

마음을 뿌옇고 흐리게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이럴 땐, 부정적이고 불편한 마음을 따라 밑바닥까지 끌려가기보다는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바라보고 위로해주어야 한다.

나 말고 누가 나를 온전히 위로해 주겠는가?


<향수> 시인 정지용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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