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정 Oct 19. 2022

제주 함덕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올해는 유난히 가을 태풍이 많은 해였습니다.

어제는 태풍 '난마돌'이 제주를 통과한다고 예보가 있었지요.

고깃배는 진즉 두꺼운 로프를 둘둘 말아 항구에 정박해 두었고 집집마다 창문이여 문이며 테이프로 구석구석 고정을 해 놓았네요.

길은 사람은커녕 강아지도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 같습니다.

다들 태풍을 피해 몸을 움츠리고 있을 때, 저는 길을 나섰습니다.

매서운 비바람보다 피폐한 제 몸과 마음을 추스르는 게 먼저였기 때문이죠.


다행히 태풍은 제주를 관통하지 않고 스쳐 지나갔습니다.

워낙 크고 강한지라 바람은 저를 지탱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고 강풍에 실린 모래는 제 뺨을 철썩철썩 때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걷습니다. 몸이 흔들리고 온 몸이 누가 때린 것처럼 아려도 걷습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머리가 터지거나 마음이 없어질 것 같았습니다.

몸을 쥐어짜서 걷다 보면 온몸은 소진되고 그러면 머릿속 상념도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봅니다.

허나, 얼마 되지 않아 헛된 기대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걷습니다. 걷다 보니 작은 어촌 마을이 보입니다.

한 남자가 보입니다. 그도 저처럼 마른 태풍을 온전히 감당하며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저와 그 둘 뿐이었는데, 저는 제 몸을 부수기 위해  걷고 있지만 그는 살기 위해 그물을 만지고 있습니다.

한참 동안 그의 등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에게 태풍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삶을 굳건하게 지탱해주는 것은 무엇일까?'하고 자문을 해 봅니다.

집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과 그와 그녀 사이의 보물 같은 자식들이 있기에 그는 힘을 내는 것일 겁니다.

한 집안의 남편으로서, 아비로서, 자식으로서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놓는 것입니다.

가족을 위해 한 없이 헌신하는 아내의 삶에 미안함과 감사함을 담은 자신만의 표현일 것입니다.

날카롭고 매몰찬 비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일을 하는 그의 등이  어느 기둥이나 고목보다 크고 굳건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를 보니 제가 비루하고 비겁한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저는 지난날의 과오와 절망으로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나  자신에게 수없이 칼과 채찍을 휘두르며 단죄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한없이 깊고 깊은 바닥에 밀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더 이상 다칠 일도 없으니까...


한 번은 불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이 일 말고 다른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사람들과 얽매이지 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그런 일 말이야."

아내는 담담히 제게 되묻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까요? 세상에는 혼자서 하는 일은 없어요."

압니다. 세상에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을요. 사람에 치이고 사람에게 상처를 받다 보니 아내에게 푸념만 늘어놓았다는 것을요.

어둡고 음침한 제 말과 눈빛에 아내까지 침식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집에 처자식이 있으니 일어서야지. 가족이 있으니까 힘내서 가정을 지켜야지!"

지인들은 내게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내와 두 딸이 나를 일으켜 세워주기 위해 수없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을.

내가 가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나를 지켜준다는 것을....



작가의 이전글 컴퓨터 세탁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