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와 함께 부엉이 여행으로 도쿄로 갔었지요. 그때는 토요일 새벽에 출국하여 월요일 새벽에 귀국하는 1박 3일의 일본 여행이 유행이었습니다.
일종의 에어텔(비행기표+호텔 숙박권)이었지요. 지금은 나이 탓을 하며 '무리, 무리.'를 외치겠지만 20대 초반, 혈기왕성한 젊음 하나로 다녀왔습니다.
20대에는 시간은 많았지만 돈이 없었고, 지금은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아이러니합니다.
대게 부엉이 여행의 코스는 도쿄 중심지, 하라주쿠, 신주쿠, 아키하바라 등등을 돌아보고 오다이바 온천에서 피로를 푼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게 정석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자 단짝이었던 A와 저는 '그들과 우리는 달라!', '우리는 틀을 벗어난 사람들이잖아!'를 외치며 부엉이 여행의 베스트 코스는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여행 일정을 잡았습니다.
어릴 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외국에서 필요 이상의 사치는 '나라 망신'이라고 생각하여 500엔 이하의 식사와 5km 이하의 거리는 두발에 의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철없고 어리석었던 것이죠. 자기의 몸뚱이만 믿고서 말이죠.
그런 우리의 여행 코스 중 하나는 '와세다 대학교'였습니다. 제가 가자고 했는데 왜 그곳을 선택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아마 '일본 고등교육의 산실을 느껴봐야 되지 않겠냐?, 우리는 단순히 즐기려고만 도쿄를 온 사람들이 아니니 말이야!'라며 겉 멋이 들지 않았을까 추측을 해볼 뿐입니다.
처음 타보는 수많은 거미줄로 얽히고설킨 지하철 노선도를 따라 엉킨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나가 듯이 '와세다 대학교'로 향했습니다.
둘러본 와세다대학의 교정과 분위기는 크게 생각나는 건 없습니다. 그것보다 대학을 향해 가던 그 길이 지금까지 기억이 남습니다.
건대입구, 홍대입구 등 대학 이름이 들어간 지하철 역에 내리면 마천루처럼 솟아 있는 복합쇼핑몰과 화려한 네온사인의 식당과 술집을 거쳐 대학교에 들어가는 우리와는 달리
그곳은 지하철 역 밖으로 나오면 조용하고 소박한 동네의 모습이었습니다.
중간중간 '고독한 미식가'에 나올 법한 작은 식당과 카페들이 종종 보였지만 대부분 일반 주택이라 신문을 돌리는 사람, 자기 집 앞마당을 쓰는 사람,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는 이 등 평범지만 소중한 일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습니다. 여유롭고 다부진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다 보니 작은 서점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와세다 도리(早稲田通り)'의 헌책방 골목이었습니다. 그중 한 곳을 들어가 봅니다. 나이 든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고 간단한 눈인사를 합니다. 그 할아버지가 이곳의 주인장인가 봅니다. 일본어를 모르는 제가 읽을만한 책은 없겠지만 헌책방을 천천히 둘러봅니다. 헌책 특유의 쿰쿰하고 구수한 냄새가 어느 비싼 향수보다 제 마음을 차분하고 고요하게 사로잡아줍니다. 작은 문고판 책을 펼쳐 중목 질감의 책장을 만져봅니다. 이 책의 첫 주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지, 어떤 마음으로 이 책을 골랐는지, 이 책이 그의 인생에 어떤 화두를 남겼을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봅니다. 이 책을 사갈 미래의 주인에게는 어떤 의미가 될 것인지도 궁금해집니다.그냥 나오기에는 뭐해서 책갈피를 하나 사고 '땡큐'라고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이 오래된 책방을 지금까지 운영해 오신 어르신께 감사와 존경을 표현합니다.'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제가 할 수 있는 말이 고작 '떙큐'밖에 없다 게 한탄스러웠습니다.(그렇다고 이 일을 기회 삼아 일본어를 공부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지요.)
친구와 다시 길을 나서면서 헌책방에 대한 기억이 하나둘씩 떠올랐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헌책방은 새책을 살 가격으로 2~3권을 살 수 있던 곳이었죠. 적은 용돈으로 여러 권의 책을 살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동네에 헌책방이 있어서 2주에 한 번 꼴로 다녔습니다. 10평 남짓인 헌책방에 들어가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헌책의 꿉꿉함이 정겨웠고 책 무더기 속에서 내가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건 보물찾기 같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작은 텔레비전을 벗 삼아 냄비 라면을 후루룩 먹고 계셨고요. 그런 풍경 하나하나가 모여 다른 세상으로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됩니다. 책을 고르는 것도 좋았지만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것 같은 헌책방 그 자체가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점차 단골이 되어 '아저씨,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할 정도의 친분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이번에 OO책이 들어왔는데 한 번 읽어 볼래?'라고 추천해주시기도 했고 '요즘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한탄하면 'ㅁㅁ책을 한 번 읽어보지 않을래?'라고 권해주 시기도 했습니다. 수십 년 헌책방을 지키며 구력이 담긴 책을 추천받아 읽으며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버텨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뱃돈이나 친척 어른들께 제법 큰 용돈을 받을 경우에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로 달려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전집을 살 수 있었거든요. 양손에 도저히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전집을 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은 참 행복했습니다. 그 순간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는지 전혀 무겁지가 않았다니까요.
이제는 주변에 헌책방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치솟는 물가에 따른 높은 임대료, 독서 인구의 감소에 따른 헌책 수요의 감소 등등 운영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니 누가 하겠습니까?
동네 작은 서점도 문을 닫는 판인데요. 동네 서점이 사라지고 대형서점이 자리를 잡은 것처럼 헌책방도 대형 중고서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겠지요.
삶이 퍽퍽하니 이제는 삶을 버텨야 한다고 하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사는 건 사치일 테니까요(그럼에도 자신의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뚜벅뚜벅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지금도 헌책방을 자주 갑니다. 이제는 10 평남 짓의 동네 책방이 아닌 번화가 속 100평 넘는 대형 중고서점이 다를 뿐이지요.
이제는 잘 정리된 MD 추천, 일간, 주간, 월간 베스트셀러의 도서 목록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고 해시태그를 달고 검색하면 자동으로 도서 추천까지 해주지요.
그래도 학창 시절 속 작은 헌책방이 그리운 걸 왜일까요?
"아저씨, 요즘 마음이 어려워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친구 때문일까요? 공부 때문일까요?"
"흐음...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마음이 요동칠 때는 OO나 ㅁㅁ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 아저씨도 이 책을 읽고 위로를 많이 받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