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보라카이
“Stop the season in the sun~”
Tube의 ’The season in the sun(1986)‘가 보라카이만큼 어울리는 곳이 또 있을까?
블루하와이안 칵테일 빛 바다와 설탕 같은 화이트 비치, 황사에 콜록거리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폐 속까지 전해지는 맑은 공기, 청아한 바람에 흔날리는 야자수 잎사귀.
’아, 이게 힐링이구나.‘
느즈막히 일어나 숙소 앞 바닷가에서 물놀이를 즐긴 후 대충 자리를 잡아 꼬치에 산미구엘 한 모금을 마셨다. 기분 좋은 취기에 이끌려 쇼핑몰에 들려 맘에 드는 티셔츠 하나를 샀다. 초록, 하양, 빨강으로 멋들어지게 꾸민 멕시코 식당에서 타코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역시, 휴식은 휴양지지.”
다음 날에도 바닷가에서 물놀이, 맥주 한 모금, 액세사리 가게에서 팔찌 쇼핑, 잘 익은 스테이크 한 조각, 한국보다 저렴한 이곳의 물가 덕분에 호사를 누렸다. 그 다음 날에도 바닷가에서 물놀이, 맥주, 쇼핑을 즐기는 데 마음이 첫날 같지 않았다.
’어? 이상하네. 재미있지 않아. 마음이 끌리지 않네?‘
여행에도 작심삼일이 있나? 휴양지에서 3일만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에메랄드 빛 화이트 비치도, 신선한 홉 향이 가득한 산미구엘도, 신선한 해산물도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어떻하지? 보라카이에서 며칠 더 있어야하는데? 시간은 금인데...”
일상의 쉼표를 찍으러 여행을 다니는데도 나도 모르게 흐르는 시간을 아까워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뭉그적거릴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들인 돈이 얼만데?“
아! 또 돈 타령, 속세에 벗어나질 못하는구먼.
환기가 되면 주변이 넓게 보인다고 하던가? 관광객만 가득한 화이트 비치를 벗어나 보라카이 전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옆으로 길게 늘여진 보라카이는 대표적 관광지인 화이트 비치 앞 길가에 휘황찬란한 식당, 쇼핑몰, 호텔 등이 즐비해 있다. 관광객들은 대부분 이곳에만 생활하기에 나 또한 광광지에 취해 있었다. ‘안으로 더 들어가 볼까?’라는 호기심에 이끌려 한 블록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보라카이라고?“
화이트 비치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울퉁불퉁한 인도, 군데군데 구멍 난 도로, 족히 30년은 되어 보이는 차에서 뿜어 나오는 쾌쾌한 내음이 가득했다. 관광객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현지인이 가득했다. ‘10m 차이인데도 이렇게 다른가?’ 헷갈리는 나이지만, 이 풍경이 좋았다. 현지인들의 삶이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흙길을 따라 걸었다. 양 옆으로는 논과 밭이 푸르는 곡식을 머금고 있었다. 갈비뼈가 보이는 소가 되새김질을 하고 있고 웃통을 벗은 아저씨의 등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은 채 곡괭이질에 열중이다. 구멍이 난 누런 런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는 리어카에 옥수수를 팔고 있었다. 2개를 사서 아내와 입에 물고 무작정 걸었다. 길에 늘여진 작은 섬이기에 길을 잃어버릴 염려는 없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실을 즐기는 순간이다.
푸른 지붕의 일층짜리 건물에서 가방을 맨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나온다. ‘초등학교인가?’ 교문 앞에서 기웃거려 본다. 교실 안에 있는 선생님이 들어오라며 손짓을 한다.
‘용기를 한 번 내볼까?’
현지인과 처음으로 독대하는 순간이다. 떨리는 마음 반, 설레는 마음 반으로 일단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을 못 뱉으는 건 세계 공통인 것 같다. 선생님과 악수를 하고 불쑥 들어오는 그녀의 물음,
"What's your job?"
"I'm elementary school teacher in Korea."
"Really?"
나도 교사라고 밝히니 금방 친해졌다. 공통의 관심사야 말로 친분 쌓기에는 최고이다. 선생님과 나는 각자의 나라에 대한 교육을 묻고 답하였다. 교과서는 무엇을 쓰는지, 어떤 교과목이 있는지, 한 반에 아이들은 몇 명인지... 직업병은 어쩔 수 없나보다. 아이들은 나와 아내가 신기한지 쳐다보고 웃기만 한다.
"Could you take a picture with us?"
”Sure.“
십여 명의 아이들과 선생님, 우리 부부는 작은 프레임 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모두 이를 드러낸 채 환한 미소를 짓는다.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아이들은 자기 얼굴을 찾느라 분주하다. 사진 한 장으로 이렇게 친해질 수 있는구나. 다음에 또 오라는 그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학교를 나왔다.
가슴이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화, 분노같은 감정은 아니다. 뭉클한 감동이라고 해야할까? 여행지에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를 볼 때, 화려한 공연을 볼 때와는 다른 감정이었다. 소소하지만 진중하고 묵직한 그런 느낌?
보라카이에서의 기억들은 대부분 흐려졌지만 이곳에서 만난 선생님과 아이들의 얼굴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이 때부터였던 것 같다. 관광객이 아닌 여행생활자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이제는 낯 선 곳에 도착하면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보고자 노력하게 된다. 여행자 거리가 아닌 현지인들이 사는 곳에 터를 잡고 현지인들이 다니는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는다. 택시 보다는 버스를 탄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환하게 미소를 지어본다.
‘새로운 연이 생길라나?’
사람 냄새 가득한 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하루.
내가 여행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