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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이 그립습니다

일본 도쿄

by 소정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대학생들에게는 배낭여행이 인기였다. 방학 때 외국물 좀 먹어봐야 진정한 대학생활인양 겉멋이 든 시절이었다(트렌드라고 해야 할까? 그때는 유독 심했던 것 같다). 다들 한 번씩 외국을 다녀오니 여행지에서 느낀 경험보다는 고생, 짠내, 모험 등의 무용담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하루에 1달러 갔고 생활했다니까. “

”선풍기도 없는 20인용 도미토리에서 지내봐, 한증막이 따로 없어. “

”나는 수십 명의 체취가 담긴 이불 덮다가 빈대에 옮았잖아. “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생애 첫 배낭여행 또한 무언가 유니크해 보여야 했다. 가까운 일본 도쿄로 가니 더 그랬다. 많은 이들이 다녀온 곳이니...

‘아... 어딜 갔다 와야 있어 보이지?’

‘시부야, 하라주쿠, 도쿄타워, 오바이바 같은 곳은 너무 흔한데?’

고민하던 끝에 한 가지가 떠올랐다.

‘와세다 대학교! 대학교를 가자!’

그곳을 다녀오면 ‘너희와는 달라. 난 단순히 도쿄를 즐기러 온 것이 아니라니까. 나는 일본 고등교육의 산실을 몸소 체험하고 온 사람이라고!’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허세’ 투성이인 나이다.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지하철 노선도를 살펴보았다. 철도의 강국이라는 말답게 노선도는 얽히고설킨 실타래 갔았다. 와세다(早稲田駅)를 찾고 나의 위치를 보며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티켓을 한 번 사면 도착지까지 갈 수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의 지하철은 지하철 회사마다 표를 다시 사고 개찰구를 통과해야 하는 곳도 있어서 이동 자체가 헷갈렸다. 출구를 나왔다가 ‘아! 여긴 아닌가 봐.’하며 다른 출구를 찾아 나선 지 여러 번, 와세다역에 도착했다.


와세다역


밖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대학교 역과는 달랐다. 건대 입구, 홍대 입구 같은 곳은 나오자마자 마천루처럼 솟아 있는 쇼핑몰, 형형색색의 식당, 술집, 상점 속에서 흘러나오는 번잡한 음악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들은 소음 그 자체였다. 하지만 와세다역(도쿄 메트로 도자이센 라인)은 소박한 우리네 동네 갔았다. '고독한 미식가'에 나올 법한 고수의 향기가 느껴지는 식당과 수십 년의 구력이 느껴지는 바리스타가 머문 카페가 종종 보일뿐 대부분 일반 주택가였다. 아침이라 신문을 돌리는 사람, 집 앞마당을 빗질하는 사람, 강아지와 함께 마실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와세다 대학교에 도착했다.


‘자, 이제 무용담을 만들어 봐야겠지?’

‘몰래, 청강을 해볼까?’

‘이곳 학생과 우연히 마주쳐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야.’

‘아니다, 내 전공을 찾아 사범대학을 먼저 가볼까?’


‘내’가 중심이 된 여행이 아닌 ‘남’을 의식한 여행이었다. 그러니 좋은 결과가 나오겠는가? 극도의 ‘I’인 성격인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도서관 문 앞에서 ‘들어가다가 저지당하면 어떡하지?’하며 포기, 사범대학교 같은 건물 앞에서 ‘일본어 아니 영어도 잘 못하는데 무슨 인연?’하며 도망. 그렇게 우물쭈물하다가 벤치에 털썩 앉아버렸다.

”아... 사진이나 찍고 가야겠다. “

그 순간 파란 눈을 가진 이가 말을 걸었다.

”Where is the student cafeteria? “

엥? 학생식당? 나도 여기가 처음인데, 어떡하지? 솔직히 이야기해야겠다. ‘저도 여기가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려 했으나

”No! “

한 마디하고 줄행랑을 쳤다. 그 와중에 친구들에게 자랑할 사진을 찍고 있는 나다.

”이런 허풍쟁이“


어깨가 축 처진채 걷던 중 작은 서점들이 하나둘씩 보였다. '와세다 도리 (早稲田通り)'의 헌책방 골목이었다.

'이런 곳에 헌책방이?'

중고, 구제 같은 물건에 애착이 가는 나이기에 일본에서 마주한 헌책방이 반가웠다. 파랑 빛 지붕에 이끌려 책방에 들어갔다. 눈인사를 하며 나이 든 어르신을 보니 이곳의 역사가 가늠되었다. 쿰쿰하고 구수한 헌책방의 향기가 마음을 차분하게 해 주었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내음은 어느 명품 향수도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향기이다. 손바닥에 잡힐만한 문고판 책을 펼쳐 책장을 넘겨본다. 거칠면서도 모서리는 매끄러운 질감을 통해 이 책의 주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지, 왜 이 책을 골랐는지, 이 책이 그의 인생에 어떤 화두를 남겼을지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본다. 이 책을 사 갈 주인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도 궁금해진다. 판매자와 구매자의 인생을 등가교환 하는 것이 헌책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벚꽃이 그려진 책갈피를 하나 사고 '아리가또'라고 인사를 건넸다. '오래된 책방을 지금까지 운영해 오신 어르신께 감와 존경을 담아 인사드립니다.'라는 속마음을 담아...


와세다대 헌책방



헌책방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다. 중고등학생 때 헌책방은 새 책 살 가격으로 2~3권을 살 수 있었던 곳이었다. 10평 남짓인 그곳에 들어가면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책들이 정겨웠고 그 속에서 책을 고르는 건 보물찾기 같았다. 언제나 주인아저씨는 손님의 기척에 아량곳하지 않고 작은 텔레비전을 벗 삼아 계셨다. 나에게는 이곳에 도피처이자 쉼터였다. 평소 자존감이 낮아 삶에서 도망가고 싶으면 헌책방으로 향했다. 단골이 되면서 주인아저씨는 '이번에 OO책이 들어왔는데 한 번 읽어 볼래?'라고 추천해주시기도 했고 ‘아저씨, 마음이 어려워요.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친구 때문일까요? 공부 때문일까요?’ 한탄하면 ‘마음이 요동칠 때는 OO나 ㅁㅁ를 읽어보는 건 어떨까?'라고 권해주시기도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버텨낸 건 챙방지기와 책 덕분이었다.


이제는 헌책방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헌책방뿐만이겠는가? 수십 년 지켜온 지역서점들도 폐업수순을 밟고 있는 게 현실이다. 치솟는 임대료, 독서 인구의 감소 등 운영을 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니 누가 책방을 하겠는가? 대형서점이 자리를 잡은 것처럼 헌책방도 대형 중고서점이 대신하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그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퍽퍽한 세상 속 삶을 버텨야 하는 요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업으로 사는 건 사치일 테니까.(그런데도 자신의 꿈과 희망을 놓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와세다대학교에서 시작하여 헌책방으로 갔다가 현재의 도서 산업에 한탄까지... 너무 산으로 갔다. 하고픈 말은 허세를 부리려 와세다 대학교에 갔다가 좌절한 뒤 우연히 마주친 헌책방 골목에서 느낀 정겨움, 고요함, 여유로움이 나의 여행관을 바꾸게 되었다.


’ 남‘이 아닌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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