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
어릴 때부터 시장이 좋았다. 사람들 손에 한가득 담긴 봉다리가 궁금했고, 바닥에 펼쳐 놓은 옷이며, 양말과 흘러나오는 트로트에 몸이 들썩였다. 채소가게, 고기가게, 생선가게를 지나치며 탕수육, 생선조림, 갈비찜을 상상하며 입가에는 침이 고였다.
”그중에서 무엇이 제일 좋아요? “
누군가 묻는다면 1도 고민 없이
”엄마랑 시장 가는 거요! “
라고 대답할 것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가면서 ’ 어제 친구가 나를 놀렸어.‘.’ 오늘 학교에서 말이지...‘라며 나는 수다쟁이가 된다. 엄마는 ’에고. 속상하겠네.‘, ’ 정말?‘이라며 프로 방청객처럼 반응하신다. 한바탕 장을 보고 난 후 ’ 아들, 어묵 먹을래?‘라며 일회용 젓가락에 오뎅을 꼽아 주신다. 오뎅을 들고 토끼가 당근을 갉아먹듯이 한 입, 두 입 천천히 베어 먹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이때부터였을까? 어디든 새로운 곳을 가면 재래시장을 찾는다. 그곳은 어머니의 향수가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코타키나발루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동남아시아 특유의 넓고 커다란 잎사귀가 가득한 나무들과 광활한 자연경관, 밖에서도 물고기가 보일 정도로 깨끗한 바다가 자랑거리이다. 여행자들은 키나발루산(말레이시아 최고봉)에서 등산을 하거나 여러 섬을 돌며 호핑투어(여러 바다에서 열대어와 산호를 보면서 스노클링을 즐기는 것)를 한다. ’휴양지란 이런 곳이구나.‘라며 감탄을 하게 되는 곳이다. 하지만 내 관심은 ’시장‘이었다.
”재래 시장이 어디에 있지?“
재래시장을 찾아 보았지만 야시장 소개만 있을 뿐, 현지인들이 이용하는 시장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야시장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여 기념품, 먹거리가 주를 이룬다. 바가지를 씌우거나 흥정을 해야 해서 개인적으로는 기피하는 곳이다.
”이럴 땐, 물어보는 게 정답이지!“
무슨 용기나 났는지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았다. 현지인도 나의 돌발행동에 흠칫 놀랐다가 손짓과 발짓을 섞어가며 알려 주었다. 말레이시아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나는 ‘Sunday?’라는 말에 ‘혹시 선데이 마켓인가? 일요일만 열린다는 뜻인가?’ 머리를 굴러가며 ”Sunday?“, ”Sunday Market?“, ”Sunday Open?“
라고 문을 열 듯이 두 팔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물었다.
”Ok!“, ”Sunday! Ok!“
라며 환하게 웃는 그를 보며 함께 웃었다.
‘일요일까지 언제 기다리지?‘
‘아! 일요일 몇 시부터 몇 시까지 하는지를 안 물어봤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역시 난 한 치 앞도 못 보는구먼.’하며 자책하다가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하면 되지! 새벽부터 가서 기다리자!’라고 마음을 먹었다.
대망의 일요일!
새벽 창문 틈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맞으며 밖을 나섰다. 설렘으로 한숨도 자지 못해 가수면 상태였다.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가는 기분이 이런 것이지 싶다. 날이 밝아지면서부터 예열하는 땅의 온기를 체감하며 선데이마켓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선데이 마켓은 이른 아침부터 시작하여 점심즈음 끝이 난다더라.
”오! 일찍 나온 보람이 있네! “
최소 몇 시간은 바닥에 앉아 기다릴 생각을 했는데 바로 시장 입장이라니! 예상 못한 소소한 기쁨들이 여행의 즐거움이 아닐까 싶다.
”자! 이제 본격적인 쇼핑을 해 볼까? “
뜨거운 열기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현지인들 틈에 끼여있으니 관광객보다 현지인 같은 착각이 들어 흐뭇한 발걸음이다. 재래시장답게 현지에서 볼 수 있는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오이처럼 생겼지만 돌기가 사방팔방 붙어 있는 이름 모를 채소를 파는 아주머니, 작은 나무 매대에 붉은 고기를 걸어놓고 파는 아저씨, 그림책 '무지개 물고기'의 주인공처럼 알록달록한 생선들, 리어카에는 국수가 한 가득이고 목욕탕 의자에 앉아 ‘후루룩’ 먹는 사람들... 아침 햇살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삶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었다.
”무엇을 사볼까나? “
두리번거리던 내 코에 달콤한 내음이 전해졌다. 과자가게였다. 사탕을 잔뜩 머금은 비스킷, 울긋불긋한 젤리, 눈알사탕을 보니 침이 고였다. 한 아기가 물고 있는 사탕은 사탕 반, 침 반이다. 울음보가 터진 아이의 옆에는 과자가 떨어져 있었다. 낯설지 않은 모습들이었다. 과일 가게로 갔다. 망고, 망고스틱, 파파야, 패션후르츠 같이 백화점에서나 볼만한 과일들이 한가득이다. 이국적인 과일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것도 이곳만의 특권이다. 투박한 껍질로 쌓인 울퉁불퉁한 열매를 샀다. 막상 입 안에 넣어보니 달짝지근하고 말랑말랑 식감이었다. '용과'와 '람푸탄'이었다. 한쪽에서는 여러 옷가지들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CUCCI', 'Burberrys'로 스펠링이 아는 것과 다르다. ‘나도 이번 기회에 명품 한 번 둘러봐?' 유혹에 흔들렸지만 꾹 참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시장이라 외국인은 우리뿐이다. 사람들이 장을 보는 나를 보며 숙덕 숙덕거린다. 나도 그들을 바라보며 속닥속닥거렸다. 한 이가 다가와 "China?", 라고 묻는다. 나는 단호하게 "Korea!"라고 대답했다. 낯선 한국인이 처음인지 사람들이 다가와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문제는 말레이시아 말이라는 것이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 못 할 때는 바디랭귀지만 한 것이 없다. 각자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Ok! Ok!", "No, No!“라고 대화를 한다. 더 이상 안 통할 때는 그림을 그려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수다를 떨었다.
”비언어적 표현으로 대화의 80% 이상 이해가 된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었어!“
실제로 검증한 순간이다.
여행을 다니면 다닐수록 여행의 여운은 5성급 호텔도 아니요, 산해진미도 아니요, 번드르르한 예술작품도 아니다. 그들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고 녹아드는 게 여행의 진한 여운이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도 시장은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농을 섞어가며 사람과 사람 간이 비빌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그 맛에 취해 여행 코스의 1순위는 항상 ’시장‘이 되었다. 어느 곳이든지 도착하면 시장을 찾아본다.
여행 루틴이 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