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타이페이
가정의 달 5월, 남들은 가족, 연인, 친구들과 봄내음을 만끽하며 나들이를 떠나겠지만 나에게는 자린고비의 시기이다. 매년 여름마다 배낭여행을 다녔기에 아끼고 아껴 여행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늦어도 5월부터는 여행 준비를 해야 하기에 남들과는 다른 느낌의 바쁨이다.
”자, 자~ 어디를 가볼까나?“
항공권 예매 사이트에서 폭풍 검색을 하던 중 ’여름 특가!‘가 눈에 들어 왔다.
”어머, 이건 질러야 해!“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아, 어디인지도 확인 안 했네. 초짜 같은 실수를 할 뻔했어.“
눈을 크게 뜨고 행선지를 보니 ’방콕‘이었다. 태국이라, 여름에 태국 좋지. 맛난 것도 많이 먹고 하루즈음은 좋은 숙소에 호캉스도 즐겨보고, 1000원정도 밖에 안하는 맥주니 맥주를 물처럼 마셔야지. 넋 나간 이처럼 ’흐흐흐‘ 웃으며 결제를 했다.
E-Ticket을 출력하고 다시 확인해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뭔가 쌔한 느낌이 등골을 흘러내렸다.
’이런, 직항이 아니라 경유였구나.‘
그래, 싼 값은 이유가 있겠지. 경유지를 보니 ’대만‘이었다. 대만공항에서 면세점 아이쇼핑을 하면 몇 시간즈음 금방 지나겠지. ’어라, 근데 이상한데?‘ 이번엔 쌔한 느낌이 몸 전체를 흘러내렸다.
’출국 편은 12시간, 귀국 편은 24시간 경유라고?‘
서너 시간도 아니고 ’한나절, 하루?‘ 이건 말이 달라지지. 공항에서 노숙을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양 손으로 뺨을 때린 후 ’취소‘를 하려고 하니 E-Ticket의 한 구석에 눈꼽만한 글씨로 ’환불불가‘가 적혀있었다.
’이런 바보. 멍충이. 초짜 맞네.‘
본의 아니게 대만 여행을 하게 되었다.
타오위완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대부분 한자어로 적혀 있어 도저히 알아먹을 수 없었다. 중학교 때 한자 공부를 해둘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조상님들의 속담 실력이란... 안내 데스크에 가니 직원의 반가운 목소리
”한국분이세요?“
”네, 네! 저 한국인 맞아요!“
자동차 운전석 앞에서 고개를 흔들거리는 인형처럼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건 이런 느낌일까? 한국말을 하는 직원의 덕분으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버스 창밖을 바라보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칭 얼리어답터를 외치는 나에게 대만은 일본 다음으로 가고 싶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선진국 대만, IT 강국 대만, 스마트 시티, 짧은 시간동안 전자제품을 섭렵하리라.‘
’타이베이 101‘의 마천루를 중심으로 멋들어진 빌딩과 고급스러운 빌라들, 천혜의 자연환경과 독특한 최신식 건물 속 스타벅스 콜드부를 한 손에 들고 거니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니 ’좀 있어 보이는데?‘하며 키득거렸다.
시내 중심가에서 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어? 생각한 거랑 다른데?‘ 예상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동탄과 송도를 생각했지만 80~90년대 청계상가와 종로와 닮아 있었다. 빨간 글자를 중심으로 형형색색의 간판과 짙은 붉음과 고동빛 벽돌들은 세월의 빛깔이다. 집마다 대문 밖에 놓인 화분에는 푸르른 식물들이 벽을 타고 높이 솟아 있다. 온난 습윤 기후인지라 잎사귀도 넓고 튼실하다. 운치있는 골목길을 따라 길을 걷다 보면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이 생각나고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말할 수 없는 비밀' 속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정겹고 가슴 한 편이 아린다.
’스린 시장‘으로 갔다. 이곳은 타이페이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야시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하철 역 개촬구를 나와 보니 밤인데도 화려한 불빛이 가득하다. 입구에서부터 먹거리로 가득하다. 꼬치, 국수, 조개구이, 숯불구이 등 식당에서 내뿜는 연기가 자욱하다. 벌써부터 입에 침이 고인다. 식도락 여행의 천국답다. 이름모를 과일 주스 하나를 샀다. 열대지방의 생과일을 그대로 갈아 주니 순도 100%의 찐 과즙이 입안에 퍼진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구경 시작!
구불구불 엮인 길을 미로찾기 하듯이 걷는다. ’길을 잃어버리면 어떻하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길을 잃을 때 펼쳐지는 또 다른 세상도 여행의 묘미이다. 양 갈래 길에 멈췄다. 왼쪽에는 의류, 신발, 화장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고 오른쪽에는 오래된 장난감, 시계, 카세트 테이프같은 구제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보인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오른쪽으로!“
를 외치며 개선 장군인양 의기양양하게 걸어갔다. 내 선택은 옳았다. 이곳은 천국이었다. 은하철도 999, 개구리 왕눈이, 마징가 제트 만화로 만들어진 종이 딱지, 계단을 스륵하고 내려갔던 무지개 스피링, 빨간 색이 매혹적인 일체형 고무 물충이 보였다. 친구와 고무주머니를 쥐었다 폈다 하며 경주했던 고무 말도 있었다. 유년 시절 100원짜리 동전을 한닢 두닢 아끼고 아껴 샀던 장난감들이 여기에 다 있었다. 금이야 옥이야 안고 다녔던 추억의 물건들의 향연이다.
’이 때는 작은 것 하나에도 행복했는데...‘
요즘은 아날로그적인 삶에 평안함을 느낀다. MP3보다는 카세트테이프와 LP의 선율이, 전자책보다는 손에 침을 묻혀 넘기는 종이책이 적성에 맞다. 테블릿 pc보다는 스케치북에 그리고 붓칠하는 그림이 좋다. 두꺼운 여행책과 지도를 보면서 길을 떠나는게 여행스러운 것 같다. 문뜩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과거에 얽매이는 건가?‘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건 아닌 것 같다. 예전의 것에 눈이 건 정직하고 순수했던 ’나‘로 돌아가고 싶은 바램인 것 같다.
적어도 그 때의 나는
다른 이의 것을 탐내지 않았고
질투하지 않았으며
남과 비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