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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라고 해서 바가지만 있는 건 아니더군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

by 소정

족자카르타라고 아는가? ‘엥? 자카르타가 아니라 족자카르타?’, ‘자카르타를 이상하게 알고 있는 거 아닌가?’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족자카르타는(Yogyakarta)는 있다(고유명사로 영어표기까지 되어 있지 않은가?)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의 제2의 도시라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이다. 족자카르타의 인상은 ‘부산’보다는 ‘경주’와 닮아 있었다. 자바 예술의 꽃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거대한 불교 사원인 '보로부두르(Borobudur)'와 브라흐마, 시바, 비슈누 신전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힌두교 신전인 '프람바난 사원(Candi Prambanan)'은 여행자를 이곳으로 이끈다. 수 천년의 역사와 흔적을 간직한 족자카르타를 온 나는 경주로 수학여행을 온 학생처럼 신났다.


밤 11시가 되어서, 족자카르타에 도착했다. 늦은 밤에 도착한 이유는 비행기표가 저렴하기 때문이다. 경유와 남들이 기피하는 시간대의 비행기는 가난한 여행자들에게 몸을 담보로 하는 채권같은 기분이 든다. 부랴부랴 배낭을 메고 말리오보로(Malioboro)에 도착했다. 숙소에 들어가 배낭을 내팽겨치고 잠에 들었다. 해가 뜨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시차가 안 맞아서 그러냐고? 2시간밖에 차이 나지 않는 시차의 문제는 아니다. 신기하게도 외국에서는 아침형 인간으로 변모하는 나의 바이오리듬 때문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면 그만큼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니 고단함은 문제되지 않았다.


image02.png 말리오보로 거리(Jalan Malioboro)


말리오보로는 여행자 거리이다. 방콕의 카오산로드와 닮았다. 족자카르타가 적혀 있는 티셔츠부터 장거리 버스나 비행기 티켓을 구입할 수 있는 여행사까지 다양하다. 여행자들은 대게 이곳에 머물면서 보로부두르 사원이나 프람바난 사원 투어를 다녀온다.


여느 동남아시아 마을처럼 이곳도 하루를 일찍 시작한다. 교복을 입은 초등학생들은 학교에 늦었는지 바삐 뛰어가고 상점의 문들은 하나, 둘 문을 연다. 마부는 말에게 지푸라기를 먹여주며 관광객들을 받을 준비를 한다. 가까운 길거리 식당에 가서 목욕탕 의자에 앉는다. 이름 모를 국수를 하나 주문한다. 그릇을 두 손으로 잡고 국물부터 마셔본다. 쌉사름한 맛이 입에 가득인 걸 보니 고수임이 틀림없다. 몇 번 먹어보면 고수의 맛을 안다고 하는데 아직도 낯설다. 얼마나 더 도전해야 할까? 중심가로 나왔다. 9시도 되지 않았는데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느 관광지와 다른 점이 있다. 외국인보다 현지인이 많은 점이다. 보라색 히잡을 입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가족부터 교복을 입은 채 서로의 사진을 찍는 고등학생들, 지긋이 나이가 들어 보인 노부부까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내국인들이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바로는 족자카르타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즐겨 찾는 국내 여행지라고 한다. 수학여행으로도 많이 오는 곳이란다. 정말 경주와 닮은 점이 많은 곳이다. 길가를 걷다보니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반지, 팔찌, 목걸이, 지갑 등이 내 쇼핑 욕구를 자극시켰다.

‘그래, 질러야지. 이곳의 특색이 드런난 유니크한 것을 사야지.‘

’아! 바가지는 절대로 안 되지. 나는 합리적인 소비자니까.‘


가죽으로 만든 팔찌, 지갑,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가죽 공예품 전문 판매점이다.

“이곳이다, 지갑이나 가방은 한국에서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합리적인가? 흐흐흐”

혼자 웃는 나를 보는 당혹스러운 아저씨의 눈빛이 따갑다. 사실, 지갑과 가방은 월화수목금토일마다 바꿔 쓸 정도 충분히 있다.

’눈가리고 아웅‘

매의 눈으로 이것저것 둘러봤다. 황토색 단지갑이 ’안녕?‘하고 유혹한다. 실밥이 튀어나오고 거친 가죽이지만 날 것 그대로가 매력적이었다.

"How much?"

라고 물었더니

"120 thousand(12만 루피아)."

란다. 12만 루피아는 대략 1만 원이기에 비싸지 않은 가격이다. 관광지에서는 바가지가 빈번하기에 흥정을 해야 한다.

’일단, 반값으로 부르자. 나는 호구가 아니니까.‘

"Sixty thousand(6만 루피아)."

을 외쳤다. 이제 나와 주인과의 진검승부다.

’어라? 분위기가 이상한데?‘

보통 두 팔을 높이 들고 ’No, No.‘ 하거나 ’Impossible!‘하는 주인의 반응이 나오는 게 수순인데, 주인은 두 눈이 똥그래졌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한 참 고민하더니 11만 루비아를 불렀다.

’보통 내가 반을 부르면 주인은 9만~10만 루피아를 부르는데? 내가 잘못했나?‘

순간 흔들렸지만,

’상술일 수 있어. 이렇게 당할 순 없지.‘ 생각에

"Too expensive! more discount!"

라고 외쳤다. 그는 기가 찬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 지으며 "No!"라고 외쳤다. 나도 마음이 상했다.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길을 나서니 가게 사장이 나를 부른다.

’역시, 다시 부를 줄 알았다니까.‘

하고 의기양양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100 thousand(10만 루피아), Ok?“

그의 제안에 ’그래, 내가 호의를 배풀어 주지.‘라는 마음으로

”OK!“라고 답하였다.

’역시, 나는 여행 베테랑이라니까.”

지갑을 손에 쥐고 어깨는 한껏 하늘 위로 올라갔다. 이때는 몰랐다. 가게 주인의 씁쓸한 웃음을...

“자, 첫 개시부터 괜찮은데?”


본격적인 쇼핑을 나섰다. 다른 상점에도 내가 산 지갑과 닮은 지갑들이 놓여 있었다.

‘싸게 잘 샀겠지?’

내가 제대로 샀는지 궁금한 마음에 가격을 훓어 보았다. ‘12만 루피아’였다. 문제는 다른 가게들도 모두 ‘12만 루피’아였다. 거기에 현지인들은 흥정없이 정가로 구입하고 있었다.

‘혹... 혹시, 정찰제?’

머리가 띵했다. 역시나 말리오보로 상점은 정찰제였다. 바가지를 미연에 방지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권장하는 곳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깎으려고만 했다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창피했다. ‘여행 베테랑’이라고 우쭐거렸던 내가 미웠다. 내가 깎은 2만 루피아(약 1,700원)은 나에게는 큰돈이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한 끼 식사할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자식에게 연필이나 공책을 사줄 수도 있고 퇴근길에 과자를 가져다 줄 수도 있는 돈이었다. 나의 편견과 교만함이 그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지갑 가게 주인에게 미안했다. 그렇다고 정가로 다시 값을 치를 용기도 없었다. 대신 떠나기 전날 모자를 뒤집어 쓰고 지인들에게 줄 선물을 여러 개 샀다. 정가 그대로 샀다.


여행지라고 해서 무조건 바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행지에는 바가지가 심하더라.', '사기 칠지 모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사람의 호의를 있는 그대로 믿지 말아라.' 같은 가이드북이나 SNS를 맹신한 나의 과오였다. 많은 이들이 흥정을 하고 무작정 값을 깎으면 주인도 깎일 것을 예상하고 높은 가격을 부르게 될 것이다. 악순환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 곳에 잠시 머물다 가는 객일뿐인데...’

다시는 나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고자 다짐했다.


“내가 겪어 보지 않는 이상 함부로 판단하고 단정 짓지 않으리라.”


image01.png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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