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필리핀, 라오스
우리나라에서 먼 여정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일까? 서울에서 부산 정도이지 않을까? 서울에서 부산까지 차량으로 5~6시간 정도 걸리니 통상 5시간 이상의 거리를 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인에게 ‘오늘 부산 출장이 있어요.’라고 하면 ‘먼 거리를 갔다와야겠네. 고생하겠다.’하겠지요. 허나 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갔다오겠네. 5시간 밖에 안 걸리잖아.’할지도 모릅니다. 우리와 달리 땅덩어리 자체가 비교가 안되니 말이다.
세상은 넓다. 여행할 곳도 많다. 그만큼 긴 이동거리는 필수다. 가령 인천공항에서 이스탄불행 직항을 타도 11시간 정도 걸리고 런던도 12시간 걸린다. 대학생 때 케냐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 때는 직항이 없어 홍콩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을 경유했는데 한나절 이상이 걸렸었다. 이동시간도 이동시간이었지만 좁은 이코노미석에서 차렷자세로 긴 시간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공항에 도착해서 목적지로 이동 할 때도 힘들었다. 낡은 버스를 타고 몇 시간 동안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그 기분이란... 브레이크가 없는 범퍼카를 타는 느낌이다.
장거리 이동에 대한 두 가지 일이 기억난다.
시리아 다마스쿠스
시리아에 가기 위해서는 우선 튀르키에 이스탄불로 간다. 거기서 남쪽의 킬리스(kilis)로 이동하는데 야간 버스로 약 12시간이 걸린다(킬리스(kilis)는 이스탄불과 시리아의 국경 마을이다). 야간 버스에서 잠을 설친 탓인지 비몽사몽한 정신으로 시리아 국경 마을인 알레포(Aleppo)행 버스를 수소문한다. 시리아행 버스는 정기노선이 없기에 버스에 사람이 꽉 차야 출발한다. 버스는 시리아 출입국사무소에 정차한다. 직원들은 대부분 소총을 든 군인들이라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비자를 발급 받고자 출입국사무소에 들어갔다. 직원은 내 이름과 국가를 확인하더니 누군가를 부른다. 군인이 나를 구석 작은 방으로 끌고 갔다.
‘이러다 감옥에 갇히는 건 아닐까?’
‘우리나라와 수교가 되지 않은 나라에서 국제 미아가 되면 어떻하지?’
두려움이 가득했다. 방 안에 들어가니 장교가 담배를 입에 문채 여권과 나를 번갈아보더니 메모지에 40달러를 적었다. 비자 발급 비용이란다. 돈을 주고 나니 여권에 도장을 ‘쾅’ 찍고 나가라는 손짓을 한다. 비자발급 비용에 대한 안내도 없었고 영수증도 주지 않았다. 비자 수수료를 핑계로 뒷돈을 챙기는 것이었다.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살아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내가 왜 시리아에 온다고 했을까?’하고 자책할 뿐이었다(다행이 비자 발급을 제외하고는 시리아 여행은 행복 그 자체였다). 다시 낡은 버스를 두 어번 갈아탄 후 수도인 다마스쿠스(Damascus)에 도착했다. 숙소 침대에 누워 이스탄불에서 다마스쿠스까지의 이동 시간을 따져 보니 20시간 이상이었다.
필리핀 보라카이
'보라카이 가는 게 뭐가 힘들어?‘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천만의 말씀! 지금에야 다니기 편한 곳이지만 15년 전에는 ’산 넘고 물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이었다. 여러 교통수단 체험은 덤이다.
우선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까띠끌란 공항으로 간다. 작은 공항에 도착하면 트라이시클(Traysikel, 승합차를 붙여 만든 바퀴가 세 개 달린 오토바이)을 타고 항구로 이동한다. 항구에서 배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보라카이 섬에 도착한다. 수심이 얕아 배가 땅까지 닿지 않기에 배낭과 짐을 머리에 이고 물속을 헤쳐 해변으로 나간다. 여기서 다시 트라이시클을 타고 화이트 비치로 이동한다.
'비행기-트라이시클-배-트라이시클' 네 번을 갈아타야 보라카이에 입성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정이 길고 복잡한 것은 감내할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은 지치다 못해 폭발할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하곤 한다. 라오스에서 있었던 일인데, 오전 8시 출발 표를 예매하고 30분 전에 도착해 기다렸지만 버스는 함흥차사였다. 언제 오냐고 물어보아도 ’금방 올거다. 기다려라.‘라는 답변만 도돌이표처럼 돌아온다. 아침부터 꼬이는 계획에 애가 타는데 이곳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다. 바닥에 앉아 간식을 먹고 음율을 흥얼거리며 기다림을 즐긴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데 조바심을 낼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쳤다.
“될 대로 돼라. '하쿠나 마타타(Don't Worry)'다!”
장거리 이동을 할 때 예상치 못한 시간과 순간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매번 익숙하지 않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여행의 일부이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가? 이런 여행의 묘미(?)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나만의 방법 몇 가지를 터득했다.
1. 어려운 책 도전하기
읽고 싶은데 도전하지 못하는 책이 간혹 있다. 여러 번 읽고 곱씹어야 하는 책이다. 오랜 시간 동안 이동할 때는 이런 책이 딱이다. 여러 권도 필요없다. 딱 한권이다. 이 책 말고는 읽을 게 없도록 한다. 갈 길은 멀고 시간은 많으니 어떻하겠는가? 자연스럽게 정독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나면 어려운 책을 꼭꼭 씹어 읽었다는 성취감과 뿌듯함이 생긴다. 개인적으로는 소로의 '월든' 이나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추천한다.
2. 휴대용 보드게임
시간을 보내기에는 보드게임만 한 것도 없다. 보통 카드형과 보드형 게임을 챙기는 데 카드형 게임인 우노나 도블은 달리는 차나 배에서 하기에 좋다. 보드형 게임인 루미큐브나 모노폴리는 터미널에서 기다릴 때나 떨림이 덜한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 즐기기에 좋다(루미큐브나 모노폴리는 여행용도 있다).
3. 글쓰기
여행 속 감동적인 장면과 기억들이 오래 간직되면 좋겠지만 쉬이 희석되기 일쑤다. 여행 중 글감이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멀리 사라져 버린다. 작은 메모장을 준비해서 사소한 기억이라도 단어, 문장으로 적어두자. 쓸거리를 모아놓고 이동하는 기차 안이나 터미널에서 기다리는 시간 동안 글을 쓰자. 혹시 아는가? 글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책이 나올지...
4. 옛 놀이 하기
전래놀이야말로 수백 년 이상의 검증된 놀이다. 끝말잇기, 윷놀이, 오목, 공기 등은 돌멩이나 동전같이 주변의 물건으로 놀이를 즐길 수 있다. 유치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다 보면 과열이 되기 일쑤다. 다들 소싯적 한가닥 날렸다고 허세도 떨게 될 것이다.
5. 그림 그리기
나는 주로 그림을 그린다. 마음에 드는 곳에 양반다리를 하고 스케치북에 쓱싹쓱싹 그린다. 그림 소재야 세상에 널렸다. 그림에 열중하다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든다. 왠지 거리의 예술가 같은 기분이 꽤 괜찮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한 번 빠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에 의식적으로 차가 들어오는지 확인해야 한다. 잘못하면 노숙해야 하는 불상사가 생기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강력히 추천하는 것은 현지인들에게 말 건네기이다. 옆자리에 앉은 현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다 보면 '벌써 도착이야?' 할 정도로 시간이 훅 가버린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 어떡하지?', '소심한 성격이라 쑥쓰러운데...' 생각은 집어 던지자! 처음이 어려울 뿐이다. 한 번의 용기로 얻게되는 추억은 여느 관광지보다 아름답다. 영어를 못하면 어떤가? 우리에게는 번역기도 있고, 바디랭귀지도 있지 않은가? 이야깃거리가 없다고? 천만의 말씀. 스몰토크로 시작하다보면 서로의 가족, 가정의 대소사까지 알게 된다. K-문화가 열풍이라 연예인 이야기만으로도 금방 친해질 수 있다. 현지인들과의 대화 꼭 도전해보시길...
요즘은 여행지에서도 핸드폰으로 게임, OTT, YOUTUBE를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한국에서 하면되는 걸 굳이 먼 타국까지 와서 귀한 시간을 허비해 버리는 건 아까울 뿐이다. 평소에 해보지 않았던 것,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자. 도전하자. 여행에서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