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보스라
시리아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 남쪽으로 110km 떨어진 곳에는 보스라(Bosra)라는 로마 시대 유적지가 있다. 약 2세기에 로마령이었던 이곳은 로마식 목욕탕, 도로, 건물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보스라는 로마식 원형극장이 압권이다. 다른 나라의 로마식 원형극장은 반파되어 볼품없지만 보스라 원형극장은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대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었을 정도다.
보스라는 시리아 남서부와 요르단 국경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버스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다.
’2시간이면 가겠네~‘
라고들 할 것이다. 그건 우리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 낡은 버스가 반포장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시속 30~40km로 달릴 것을 예상하면 새벽부터 길을 나서야 한다. 버스터미널은 아침부터 사람들로 가득하다. 큰 보자기를 머리 위에 얹은 아낙네부터 낡은 가죽 잠바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문 아저씨까지 다양한 사연과 여정을 담은 이들이 어릴 적 보아왔던 우리의 모습과 닮았다. 영어가 전혀 안 되는 이곳에서 내가 외치는 말은 딱 하나,
“보스라~ 보스라~”
낯선 동양인이 ’보스라‘만 외치니 사람들이 신기한가보다. 몇 몇 이가 다가와 낡은 봉고차를 가리키며 ’보스라‘라고 알려준다. ’보스라‘하고 외친 한 마디가 ‘보스라를 가려고 하는데 어느 버스를 타야 할까요?', '저 버스가 보스라 행입니다.’라는 대화가 만들어 졌다. 여행은 신기함의 연속이다.
“커피?”
기사가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내어 준다. 시리아에서는 처음보는 이에게도 커피나 차를 권하는 문화라 마음이 따뜻해진다. 건네 받은 커피는 까맣다 못해 시커멓다. 에스프레소 4샷은 때려 박은 듯한 진함이다. 이곳의 커피는 여과지를 사용하지 않고 커피 가루에 뜨거운 물을 넣어 우려내기에 바닥의 1/3은 커피 가루다. 체하지 말라고 잎사귀를 띄워주는 것처럼 '후후' 커피 가루를 불면서 한 모금 마신다. 극강의 씁쓸함은
만성 변비를 해결할 만큼의 강도이다. 주변에 모인 이들이 말을 건넨다.
“Where are you from?”
“Korea!”
“North or South?”
“South.”
‘남한 사람이니? 북한 사람이니?’ 외국 여행 중에 흔히 듣는 질문이다. 특히, 시리아처럼 한국과 수교를 맺지 않은 나라에서는 특히 그렇다. 대수롭지 않았던 분단의 현실이 타국에서 더 실감 난다.
‘보스라~’라고 외치는 기사의 말을 듣고 봉고차에 탔다. 차 안에는 나와 아내, 여동생 그리고 현지인 3명이 전부다.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보스라에 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럴 것도 한 것이 작은 시골마을이라 별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수 세기 전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던 이곳도 지금은 인적이 드문 곳이 되어 버린 것을 보니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좌석 앞 한가운데 놓인 24인치 모니터에서는 시리아 가수의 뮤직비디오가 나온다. 주문을 외우는 듯한 남자의 노랫소리가 입 모양과 불협화음이다. 립싱크가 분명하다.
차는 비포장도로에 덜컹, 도로에 파여 진 구멍에 덜커덩, 내몸도 차의 율동에 맞추어 위아래로 요동친다. 몇 시간 동안 바이킹을 타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봉고차가 섰다.
"Bosra!"
기사의 외침에
"Bosra?”, "Bosra?”, "Bosra?”
운전기사에게 여러 번 확인한다. 짜증 섞인 “Ok! Yes! Bosra!”를 들은 후에야 봉고차에서 내렸다.
주위에는 모래만 바람에 날릴 뿐 황량한 서부 시대의 한 장면 같다. 단층으로 된 낡은 네모난 건물들이 보인다. 그곳을 향해 걷는다. 따가운 햇살, 지글거리는 바닥 열기, 한증막 같은 바람에 실려 오는 먼지와 모래들… 화성에 온 듯한 기분다. 가방에서 영문판 론리플래닛을 꺼내 지도를 펼친다. 동서남북 방위를 찾고 랜드마크를 정한다.
‘탐험가가 된 기분이군’
고대 도시를 찾아 모험을 나선다. 너무 더운 시간이라 그런 건지, 시리아의 종교와 맞닿는 곳이 아니어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길을 걷는 동안 들개 몇 마리만 보일 뿐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차원의 세계로 떨어진 기분이다.
‘강도가 갑자기 나타나면 어떻하지?’
‘들개가 나를 물면 광견병 걸리는 건가?’
두려움이 몰려왔다. 사람이 많을 때는 긴장을 놓치지 않게 되는데 사람이 없을 때도 긴장이 된다. 어느 곳이든지 적정선의 사람들이 있어야 안정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사람 없이 살 수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커다란 로마식 기둥이 보인다. 듬성듬성 이가 빠졌지만 보스라의 기둥은 수백 년을 잘 버텨 왔다. 중심도로 옆으로 놓인 내 키만한 벽돌과 흔적들은 그 시절 오손도손 밥을 먹던 공간이었을 것이고,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목욕탕이었을 것이며 사람들이 모여 밤새 서로의 의견을 펼치던 회장이었을 것이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기둥 사이로 걸음을 재촉한다. 햇볕을 피할 공간이 없기에 온 몸은 땀과 증발을 반복하며 티셔츠가 소금 가루가 되었다.
‘피가 증발해버리진 않을까?’
하는 무서움이 엄습했다. 사막의 날씨는 살면서 처음 접해 보는 거라 별의별 생각이 다들었다. 다행히 작은 그늘이 보였다. 응달에서 물 한 모금을 씹어 먹고 크게 숨을 들어 마시며 내 몸의 세포들이 잘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본다.
'여기가 보스라 원형극장이구나.‘
내가 이 곳에 온 이유, 보스라 원형극장을 보기 위함이었다. 보스라 원형극장은 원형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굳이 로마까지 갈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정갈하고 웅장한 자태에 ’우와‘, ’이야‘하고 감탄만 연거뿌다. 지금도 공연을 한다고 한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작은 창에 비친 햇살만 반길 뿐 적막하다. 동굴 속 한 줄기 횃불처럼 햇살을 길잡이 삼아 걷는다. 밖을 나오니 무대였다. 가운데에 서서 전체를 바라보니 거대함 그 자체이다. 반원을 따라 좌석들은 수십 개의 층을 이루고 있고 끝에서 끝까지는 수백 걸음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크다. 1만 5,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규모에 놀랐지만 허허벌판에 원형극장을 짓기위해 수많은 시리아인이 희생되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무대에서 내려와 관람석 끝까지 올라갔다. 정상에 오르니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혀준다. 담장 넘어 밖을 둘러본다.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삶의 흔적들은 한 때 80,000명이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무대 위로 다시 올라갔다.
"아, 아, 아~~~, 여보, 잘 들려 ?"
관람석에 있는 아내에게 외치니 두 팔로 동그라미를 그린다. 무대 구석으로 가서 "여기서도 잘 들려 ?" 하니
"응 !'
하고 동생이 화답한다. 무대 어디서든지 말을 하면 관람석 끝까지 소리가 잘 전달된다고 한다. 과학적으로도 뛰어난 극장이다.
"흐음... 노래나 한 소절 해 볼까?"
둘 다 가위 표시를 한다. 뭐 어떤가, 아무도 없는데 노래 한 가락을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아내는 등을 돌리고 동생은 귀를 막는다. 역시 잘 들리나 보다(내 노래가 듣기 싫은 건 아닐거라 믿는다). 언제 이런 곳에서 노래를 불러보겠는가?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한다. 눈치보다 보면 나중에 꼭 후회하게 된다. 노래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니 한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내나 동생이 칠 일은 없을 텐데?'
둘러보니 관람석 중간 즈음에 현지인 남녀가 나를 향해 박수를 쳐주었다. 귓가까지 빨갛게 타올랐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뻔뻔해지지 뭐.‘
하고 오른팔을 흔들어 배에 대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를 했다. 보스라 원형극장은 정기적으로 오페라 공연을 한다고 하는데 그걸 보지 못한게 아쉬웠다.
몇 년 후 시리아 내전이 일어났다. 독재정권 퇴진, 민주화 갈망,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 IS 등 다방면적인 원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아무 죄도 없는 민중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입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죽고 삶의 터전을 잃었다.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알레포(Aleppo)와 팔미라(Palmyra)도 파괴되었다. 다행히 보스라는 남쪽 구석에 있어서 아직도 버티고 있다곤 하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진까지 터져 시리아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나는 대의와 신념을 잘 모르는 평범한 소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광기 아래 행해지는 살상과 파괴 행위는 지탄받아야 마땅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시리아에 평화가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한다. 평온함이 찾아오는 그때, 우리 두 딸과 함께 시리아로 여행갈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