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카파도키아
튀르키예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8배이다. 넓은 땅어리만큼이나 ‘옆 도시 갔다 올게.’하면 족히 10시간은 걸린다. 한국은 일일생활권이지만 여기서는 불가능하다. 2주 동안 튀르키예 여행을 다녔는데 시간을 아끼다 보니 주로 심야버스를 이용했다. 장점은 시간과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었으나 단점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온몸은 찌뿌둥하고 만성 수면부족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20대였기에 '젊음', '열정', '패기'로 버틸 수 있었다(지금은 1시간만 걸어도 온 몸이 쑤신다).
카파도키아에서 파묵칼레로 넘어갈 때였다.
‘이번에도 심야버스군.’
매번 심야버스를 타는게 지치기 시작하였다. 시계는 자정을 향해가고 있었고 터미널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최소한의 전등만 켜져 있기에 주변은 정막과 어둠이 깔렸다.
‘심야버스도 버스지만 이 분위기가 무서워.’
해지기 전에 숙소에 들어가는 게 여행 철칙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꼭 이럴 때 공포영화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저기가 매표소구나.’
작은 불빛이 보이는 매표소에 들러 예약한 버스표를 받아 승강장으로 나섰다. 여행자는 우리 가족뿐이었다. 터미널 곳곳에 구멍이 숭숭 나고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벽은 스산스러웠다. 버스가 오고 가며 사람들을 싣고 나른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버스가 승강장까지 오지 않고 근처에서 정차하는 것이었다.
'어? 그럼 어떤 버스를 타야 하는지도 모르잖아.'
'나 튀르키예 말 모르는데.'
'버스를 놓치면 터미널에서 어떻게 밤을 보내지?'
한 덩이, 두 덩이, 불안감이 어깨 위에 쌓이다 보니 주변의 것들이 예민하게 보였다. 터미널은 귀곡 산장같았고. 히잡을 쓴 여자와 가죽 재킷을 입은 남자는 부부소매치기처럼 보였다. 길 건너편에 있는 한 무리는 나를 보며 숙덕거리는 것 같았다. 이미 버스가 올 시간은 지났다. 오금이 저려온다.
대낮이었다면 '버스가 좀 늦나 보지.', '여기는 튀르키예니까, 튀르키예 타임에 적응해야지.'라며 여유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버스가 나를 버린 건 아닌지, 버스 스케쥴이 바뀐 건 아닌지, 하염없이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했다.
‘포기하고 근처에 잠잘 곳을 알아봐야 하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다. 이번의 선택이 튀르키예 여행 전체를 좌우할 수 할수도 있다.
멀리서 새빨간 버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이 버스가 맞나? 아닌가?’
우왕좌왕하고 있는 찰나 건너편에 있는 사람들이 손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소리를 지른다.
‘뭐.. 뭐지? 내가 뭐 잘 못했나?’
‘혹시.. 테러?’
그들에게 밉보인 짓을 하지는 않았는데, 이역만리에서 납치를 당하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그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험상굳은 표정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막대기 하나 없다. 나는 본능적으로 왼손은 힙색을 잡고 오른손은 주먹을 쥐었다.
"저기요! 저 버스 타야 해요!"
환청이 들리나? 우리말이 들렸다.
‘혹시, 나를 구원해 줄 우리 민족?’
주위를 살펴봐도 한국인은 없었다.
"아저씨! 저거 타야 한다니까요!"
나에게 다가오던 무리 중 한 남자가 외친 말이었다.
"... 아... 아!.. 네?"
당황한 나머지 말을 얼버무렸다. 나의 떨림이 그들에게 전달되었는지
"내가 한국에서 10년 일했어요. 한. 국. 말. 할 줄 알아요. 한국 사람이죠?"
"아! 네!"
"표 보여주세요."
우리나라에서 일했다던 그는 내 표를 보고 목적지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버스 기사와 무어라 한 참을 이야기나누었다.
"지금 저 버스를 타고 가야 해요. 저 버스 놓치면 밤새 여기 있어야 해요.“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순간 경계심이 풀렸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무서운 표정과 거친 행동을 하던 그들은 나의 왜곡된 시선이었다. 나처럼 버스를 기다리는 평범한 가족이었다. 나를 빤히 쳐다봤던 건 한국인이 맞는지, 이방인인 내가 길을 잃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할 때 한국 사람들, 많이 도와줬어요. 고마웠어요. 나도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요."
라며 버스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파묵칼레에 도착하면 알려주라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그의 손을 꼭 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심으로 감사함을 전했다. 그도 내 손을 꼭 잡아주며
"터키에서 좋은 일만 가득하세요."
라고 화답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Teşekkürler(감사합니다.)' 한마디를 못 했다. 못 했습니다. 기본 인사말 정도는 튀르키예어로 준비했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 같았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에게 이메일 주소도, 전화번호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에게 감사를 표할 길이 없었다. 정말 우둔한 나였다.
여행하다 보면 어디까지 사람을 믿어야 할지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분이 쌓이는 순간 내 지갑에 손을 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서든지 나도와주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여행길에서는 어느 정도의 긴장감과 경계심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게 과하면 상대의 호의나 관심을 저버리게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 양가감정의 균형을 잡는 것 또한 여행에서 얻게 되는 배움이다.
다시 돌아와서, 결국 나를 도와준 이에게 아무런 보답도 하지 못했다. 대신 그가 나를 도와준 것처럼 우리나라에 여행 온 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보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