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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에스 Jan 05. 2022

예쁜 다섯살과 철든 서른일곱

[철없는 서른 여섯과 미운 네살]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서 한 해를 넘기며 아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 아이와 나 사이에 한 해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감정이 오갔다. 물론 좋은 감정도 많이 나누었지만 때로는 날선 손톱으로 할퀸 것 같은 마음의 생채기를 남겼다. 일 년동안 환장할 것 같았던 나의 육아 민낯을 글로 써내려갔다. 대부분 아이에게 실수한 말, 행동을 반성하는 나의 반성문 같은 글이었다.



“육아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 맛 육아” 내지는 “환장 육아”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나의 솔직한 육아 감정과 그 안에서 다시 보게 된 나의 결핍, 불안 같은 부정적 감정들을 글로 표현하고 보니 내가 얼마나 스스로 “나”에 대해서 잘 아는지, 내가 무엇 때문에 육아 자체를 힘들어 하는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가 이틀에 한번 꼴로 눈물없이 육아를 할 수 없는 이유는 “왜” 힘든지,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하면 더 나은지도 알지만 육아를 하다보면 나도 사람이기에 순간 순간 일어나는 감정들을 억누르거나 조절하는 것이 어려워서 늘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후회를 하는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올해엔 조금 나을까...? 

나는 육아에 자신이 없고, 더군다나 지금 잔뜩 겁을 먹은 상태다. 모든 상황들이 트라우마가 되었다.

모두들 왜 내 자식을 키우며 겁을 내느냐고 물을 것이다. 


아이를 처음 초음파로 만났던 순간을 기억해 본다. 난황이 반지처럼 동그랗고 심장이 반짝 반짝이며 커다란 소리를 쿵쿵 내던 그 벅차고 감동적이던 순간부터 태동이 너무 심해 잠을 못이루던 그 순간까지 나는 육아에 대해 "환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면 조용히 책을 읽어주고, 몬테소리 교구를 구비해 두고 매일 주제를 정해 그림책과 교구를 준비해서 아직 혼자 오래 앉아있거나 걷지도 못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선생님이 된 것처럼 하루종일 떠들어댔다. 이 때까지는 잠 안자는 것 빼고는 상상한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아이가 걷고, 뛰고, 말하면서 부터는 모든것이 달라졌다. 



아이는 성장했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이 커지자 항상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했다. 물론 그것이 인간이 가진 본능이니 너무나 당연한 아이의 모습이지만 네 살까지는 "아직 아기니까~"하며 봐줄 수도 있었던 것이 다섯 살이 되면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보기에는 아이가 한층 성장한 느낌이기에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의 아이의 모습에 조급함을 느끼거나 걱정이 되는건 너무나 당연한 것 같다. 일 년동안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들을 꾸준히 가르치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들이 몇 가지 있고, 그것들이 나에겐 "이루지 못한 과업"같은 느낌이라 때로는 "상실감"마저 든다. 


365일 엄마랑만 생활하고 외출조차 하지 않는 삶이라면 천천히 배워도 상관 없지만 아이 역시 유치원에 가고, 친구들과 생활을 하고, 엄마와 아빠가 아닌 어른들과 시간을 보내야 하기에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 "돌보기 어려운 아이, 튀는 아이"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이 조차 나의 기우일 수도 있지만...) 네 살, 일년동안 일정한 규칙과 틀 안에서 지키는 연습하는 것을 원에서도 집에서도 노력 해보았지만 크게 좋아지지는 않았고, 되려 아이의 스트레스는 높아져 집에오면 오히려 "불안"을 다스리려고 하는 행동을 많이 보였다. 



아이는 가장 편한 사람을 만나면 진짜 자기 모습을 보여줬다. 가장 편한 사람은 바로 엄마인 "나"

하원과 동시에 자기전까지 "나는 아기야 아기 으앙 으앙~"하며 갑자기 어릴때도 한 번 하지 않았던 손을 빨기도 하고, 업어주세요 안아주세요 하며 기다란 팔을 쭉~ 뻗어 내 가슴을 자꾸만 쓸어 만지려고 한다던가, 이불을 끌어모아 소중이에 갖다 대고 비비는 행동을 한다던가 이런 식으로 집에만 오면 본인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어떤 "행동"을 반복했다.  



나는 일단 "행동"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지 않고 '아이가 불안 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다스리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주거나 방해하지 않고 있다가 "소중이를 만지면 아플 수 있고, 정 만지고 싶으면 그건 혼자 있을때만 하는거야~비밀스러운 거거든." 하며 가볍게 말하고 지나치곤 했다. 

그 때는 그 횟수가 너무 잦아서 겉으로는 괜찮은 척 했지만 내심 너무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기 이를데 없었다. 어른의 시각으로 봤기 때문이었겠지... 찾아본 바에 의하면 그 행위 자체도 "손 빠는 행위"와 같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남편에게도 과도한 관심을 갖지 말라며 공부한 내용을 일러줬고, 아이는 나름대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면서도 '아..누가 있는 곳에서는 소중이를 만지면 안되는구나?' 알게되었고, 방으로 눈치보며 들어가서는 혼자의 시간을 갖곤 했다. 그 때 지나가다가 눈이 마주치면 "엄마~ 저 혼자 있었어요~" 하며 해맑게 웃었다. 

그 때의 나는 정말 "그만 좀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순간적 감정을 참아내며 관심을 갖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최근에는 한번도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 당시에는 '아무리 가르쳐도 좋아지는게 하나도 없구나.' 생각 했지만 지나고 보면 아이도 차근히 하나씩 배워가고 있었고, 부모가 흔들리지 않고 가르침을 잘 유지하는 것은 그대로 학습 해나가며 자연스레 고쳐나갔다. 지금 서른 일곱이 된 나 역시도 하루하루 감정이라는 파도 속에서 힘 없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태어난지 4년 밖에 안된 아기에게 "왜 안배우니? 엄마가 가르쳐줬잖아.!" 하고 비난하고 지적하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 그리고 세상의 편견과 시선 속에서 얼마나 외로울까...



네 살에 배워야 하는 것이 앉아서 스스로 밥먹기, 활동할 때 돌아다니지 않기, 순서 잘 지키기 등의 그저 기초생활 습관에 대한 것이었다면, 그것들은 이제 아이가 스스로 집에서 기관에서 부딪치며 깨달아야 할 것들이 되어 버렸고, 다섯 살에는 아이에게 많은 장점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면서 상처받는 일이 좀 줄어들도록 "나는 괜찮은 아이구나!" 라는 감정을 심어주고 싶다.

엄마인 "나" 부터 감정적으로 많이 성숙해져서 아이를 보듬어 주고 싶다.



다섯 살에는 그저 사랑을 조금 더 많이 주고 싶다. 밥을 먹으면 그저 먹어줘서 감사하다고, 영어 영상을 참고 봐주면 엄마가 그리도 좋아하니 봐줘서 고맙다고, 엄마를 사랑해주어서 너무나 고맙다고.. 정말 정말 모든 것이 고맙다고... 그 어느 하나 당연한 것은 없다고 말이다.


[예쁜 다섯살과 철든 서른일곱] 에서는 불안과 결핍, 내 육아에 대한 후회의 이야기가 아닌 더욱 성숙하고 철든 서른 일곱에 걸맞는 육아에세이를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철없는 서른 여섯과 미운 네살]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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