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배송원의 흔한 월요일

by 냥이

- 여정의 시작

눈을 뜨니 월요일 아침 6시 25분.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잠까지 줄여가며 붙잡고 늘어졌던 나의 주말은 매정하게도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할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나는 마치 모 게임에서 공주를 구하러 모험을 떠나는 배관공처럼, 다시금 주말을 되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주말을 되찾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내가 한 주 동안 해야 할 일들을 해나가면서 중간중간하고 싶은 일들로 나를 충전하며 전진하는 것.

몸을 씻고, 말 그대로 대충의 식사를 하고,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집 밖을 나서는 것으로… 그 여정의 서막이 오른다. "월요일이네요." 이 한 마디를 출사표처럼 가족에게 남긴 채, 그렇게 집을 나선다. 일이 있는 걸 감사히 여기라는 어머니의 축복을 담은 말씀이 귀에 들렸지만 지금은 딱히 그렇게 감사하고 싶은 타이밍이 아니다. 애써 못 들은 척, 버스 정류장으로 빨리 발걸음을 옮긴다.


- 출근

회사가 정한 근태를 사수하는 것으로 그날 하루 업무를 시작한다. 출근시간은 8시. 버스로 출근할지, 버스로 간다면 몇 번 버스를 타고 갈지. 버스로 가는 게 늦는다면 택시를 타고 갈지. 나는 내가 서있는 정류장에서 머리를 굴리며 선택을 해야 한다. 오늘은 늦지 않게 집에서 나온 편이라. 버스를 이용했다. 갈아타는 정류장에서 또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하는데 현재 내가 근무하는 곳의 가장 높은 보스라고 할 수 있는 팀장님이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잡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 그 권력의 노른자에 있는 팀장님마저 지각 앞에는 공평하게 심판 당하기 때문에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저렇게 달리는 것이다. 팀장님은 훌륭히도 버스에 타는데 성공하셨다.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팀장님에게 해내셨군요! 같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 참았다. 아무튼 무난히 출근 시간을 지켜 근무하는 병원에 도착했다. 카드를 찍고, 유니폼을 입고… 그래, 여기까진 쉽다. 그게 끝나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폐기물 용기 배송

오전에는 폐기물 용기 배송을 한다. 30L 황색, 30L 적색, 20L 황색, 5L 황색. 주로 4가지 종류의 폐기물통을 L카에 실어 부서에서 청구한 수량만큼 배송을 해준다. 동, 서, 신관이 있는데 나는 주로 신관을 배송한다. 부서별로 물건을 납품할 때 검수용으로 쓰이는 납품서 장소와 요청량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 서류가 주어진다. 프로는 계획적으로 배송을 하는 법. 다른 팀원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모두 배송 시작 전 그 서류를 받고 이른바, ‘견적 내기’라는 작업을 한다. 그게, 프로의, 방식이니까.

내가 늘 담당하는 신관의 오늘 총물량은 275개. L카 하나에 실을 수 있는 물량의 최대치는 30L와 20L의 조합에 따라 다르다.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신속하게 배송 플랜을 짠다. “좋아, 크게 1번, 중간 1번, 작게 1번으로 3번에 끝내주겠어!” 라는 마음가짐으로 서류에 나만의 견적을 정리한다. 그렇다. 나만의 플래이를 펼치는 거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시간이 많고,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145,135,125 병동 - 30L 황색 40 / 30L 적색: 40 / 5L 황색 :15

95,96,75 병동 - 30L 적색: 50 / 30L 황색: 15 / 5L 황색 : 45

분만장, 건강증진센터 G구역 및 외래 - 20L 황색: 65 / 5L 황색 : 5

정말 완벽하게 멋진 견적을 짠 뒤 신속 정확한 배송으로 업무를 수행한다.


주요 이동수단은 신관, 동관 화물용 엘리베이터. 손으로 가볍게 들고 다닐 만한 물량일 경우 계단까지 활용한다. 배송의 기본은 정해진 장소에 물건만 넣어주는 일이지만, 그러고 떠나면 끝나는 일이 아니다. 물건을 적치한 이후 갖고 온 물건의 종류와 수량이 표시된 납품서류를 보여주며 검수를 요청해야 하는데 조무원님에게 요청하는 방법과 데스크에 있는 간호사에게 요청하는 방법 두 가지가 있다. 간호사님들에게 검수 요청을 하면 내가 제시한 납품서에 바코드를 PDA 기기를 통해 읽어내서 현장에서 직접 검수하는 방법인데 아이디, 비밀번호를 기기에 입력해 로그인해서 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그에 반해 조무원님들은 굳이 납품 서류가 없어도 전산으로 확인해서 PC로 검수가 가능한 특성이 있기 때문에 “검수 부탁드립니다. ” 그 한마디로 해결이 된다. 빠른 일처리를 위해서 배송을 갔을 때, 조무원님의 모습이 보이면 되도록 조무원님들에게 검수 요청을 한다. 그렇게 3번의 폐기물 용기 배송을 끝내고 나니 시간은 오전 10시. 휴식시간의 시작이다.


- 휴식시간

누군가 내게 왜 그렇게 폐기물 배송 업무를 계획적으로 신속하게 하는가? 하는 질문을 한다면 “그게, 프로의, 방식이니까"라는 것이 나의 공식적인 대답이지만, 실상은 이 회사 스케줄의 특성, 휴식이 언제 시작되는지는 개인 기량에 달려있지만 휴식이 종료되는 시점은 항상 11시 30분으로 고정되어 있음에 이유가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일을 빨리 끝내면, 또 어디 일손 부족한데 잡혀가서 일하는 거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폐기물 용기 배송하는 인원은 오전 폐기물 용기 배송하는 날 만큼은 그 업무가 끝나고 간섭이 거의 없는 편이라, 무슨 비상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일을 빨리 끝내면, 빠른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우리는 이 휴식시간 동안 매일 11시에 직원식당에서 식권 카드를 이용해 밥을 먹거나, 병원 1층에 운영중인 분식을 먹거나 편의점에서 먹거나, 하는 방식으로 식사를 해결할 수 있고 그 전후로는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각자의 장소에서 휴식을 취한다.


재작년 까지만 해도 병원 지하 1층에 직원 라운지라는 휴게 공간이 든-든하게 있어서 거기서 음료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잠도 자면서 진짜 마음껏 쉬었는데, 그 놈의 코로나가 터진 후에는 이용을 할 수 없게 되어서 매번 그곳을 지나칠 때 묘한 씁쓸함을 느낀다. 이번 휴식시간에는 K군과 카페를 가서 아이스티를 얻어먹었다. 사무실 직납 배송팀에 있다가 최근에 진료재료 팀으로 합류한 K군은 발군의 게임 실력을 인정받아. 나를 포함 많은 직장 내 리그오브레전드 유저들에게 호감을 사고 있는 친구다. 같이 듀오를 하면 든든하지 아주. 아무튼 이 K군과 요새 갈증 타이밍이 자주 겹쳐서, 카페를 자주 가는데, 내게 선뜻 이번엔 자기가 사겠다며 계산을 하는 호방한 모습이 이 사람의 됨됨이를 보여주는 듯 마음에 들었다. 난 개인적으로 빚을 오래도록 간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번 주 안에 음료를 사줄 것을 약속하며, 즐거운 티타임을 가졌다. 티타임이 끝나자, 10시 35분 정도가 되었는데 그때 나는 허기보다 휴식에 대한 갈증이 더 심해서 편의점에서 미에로화이바 한 병, 그리고 아까 폐기물 배송 때 조무원님께 받은 칙촉과 빅파이로 식사를 대충 때우고 남은 시간을 휴식에 투자했다. 쉴 때는 먹는 시간조차 아껴서 전력을 다해 쉰다. 그게, 프로의, 휴식이니까. 그리고 집에서 아침에 굶고 나온 것도 아니니까, 괜찮겠지 뭐.


- 진료재료 배송

매일, 평균적으로 11시 30분이 되면 진료재료팀의 두 번째 배송 물량이 하역장으로 들어온다.

그때는 사무실에서 직납 물품을 배송하는 인원을 제외한 진료재료 배송 팀 전원이 하역장으로 모여 2차 물량을 시작으로 오후까지 연이어 오는 2,3,4차 배송 업무를 한다. 하역장에서 만난 M 씨가 이런 말을 한다.

"차가 한 10분만 더 늦게 왔으면 좋았을 텐데…."

"M 씨, 아마 우리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

진료재료 배송은 말 그대로 환자들에게 필요한 진료재료 물품들을 배송하는 업무다. 누구는 목발이 필요하고, 누구는 주사기가 필요하고 필요한 게 다 다른데 이 배송 같은 경우는 타지에 있는 물류센터에서 박스로 피킹이 완료된 상태로 하역장에 오기 때문에, 우리는 박스에 스티커로 표시된 배송지로 박스들을 나눠서 카트에 실어 자신이 맡은 구역으로 원내 배송을 하면 된다. 진료재료 물품 배송의 경우 별도의 검수는 필요 없고, 물건을 각 병동 치료실에 적치. 외래의 경우 데스크에 전달하는 방식으로 배송 완료가 되며 귀찮은 점이라면 반납 서류, 오 반입 물품, 교환건 물품 등을 함께 챙겨서 처리해야 하는 서브 미션들이 있다는 것.


폐기물 용기 때보다 훨씬 많은 인원들이 붙어서 업무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의 조합으로 협업을 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을 볼 수 있다는 특이점이 있다. 트림하는 놈, 노래 부르는 놈, 소리 지르는 놈, 물량 적어서 웃는 놈, 물량 많이 걸려서 우는 놈, 그 힘든 놈 놀리는 놈, 도와 달라는 놈. 도망치는 놈. 도망치는 거 잡아서 시키는 놈. 징징대는 놈. 정신 나간 놈… 등등 종류가 다이내믹한 편이다.


배송하는 수단으로는 ‘와이어’ 라고 하는 바퀴 달린 3층 카트, ‘롤’ 이라고 하는 무식하게 큰 카트. ‘L카’ 라고 하는 조그만 카트 3종류인데. 특히 와이어가 물건을 정리할 때 효율이 발군이라 하역이 마무리될 때쯤 미묘한 긴장감 속에 와이어 쟁탈전이 일어난다. 뭐, 상황에 따라 자기 파트 물량이 감당 안되게 터진 인원에게는 양보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래도 와이어 하나 확보하면 든든하니까 양보하는 건 뒷일이고 다들 와이어부터 챙기려고 하는 편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당연하게도 와이어를 챙겼다. ‘그게, 프로의, 순발력이니까. ‘ 근데 막상 내가 가는 동관 9층, 10층 물건 실어 놓고 나니 와이어 반도 다 안 찼네. 이럴 땐 오늘 꽤 편하게 가는 날인가 보다~하고 빠르게 챙겨서 엘리베이터로 출발하면 된다.


- 별관 배송

다사다난한 진료재료 배송을 끝내고 원내 사무실로 귀환하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별관 배송과 사무실 직납 배송이다. 하아, 여기가 배송 지옥인가? 아마도 난 전생에 배송을 하고 싶은데 못해서 뒤진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부터 배송할 별관은 직원들이 주로 가는 신관, 동관, 서관과는 독립된 구역으로 사무실에서 꽤나 위치가 멀리 떨어진 배송지다. 특징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다. 평균적으로 적은 물량, 멀고 복잡한 동선. 언제부턴가 이 별관 배송을 주로 내가 가게 되면서 나는 공식 별관 맨이 되었다. 별관을 가는 물건이 있으면 사람들이 나부터 찾는데… 그간의 노하우로 별관의 부서와 길을 꿰고 있는 터라 별관 배송 갈 일이 있으면 이제는 반갑게 챙겨서 출발한다. 나 밖에 할 수 없는 일, 내가 해야만 하는 일. 그게, 에이스의, 무게니까. 왠지 모르겠지만 오늘 나 일텐션 끝내준다, 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피디하게 별관 부서 배송을 두 번이나 갔다 왔는데, 회사 단톡 방에 사무실 J 씨로부터 별관 오배송 연락이 왔다. 별관 8층과 4층에 물건을 나눠줘야 되는데 8층에 전부 다 줬다는 내용의 오배송. 이 상황을 우린 전문용어로 "똥 쌌다" 라고 부른다. 으흠~ 왠지 오늘 모든 게 스무스하더라 싶더라고. 근데 따지고 보면 그게 딱히 내 잘못은 아니다. 내 똥이 아니란 말이다.


납품서에 적혀 있는 배송지에 4층 배송지에 대한 정보가 받는 사람 이름 빼고 전부 누락되어 있는데, 내가 뭔 수로 그걸 4층인 줄 알고 배송하냐 이 말이지. 뭐… 내 잘못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가 배송한 물건이고 결자해지라는 말도 있으니 나는 군말 없이 가서 똥을 치우고 J 씨에게 짧은 답장을 남겼다. "해. 결" 나는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프로의, 숙명이니까.


- 단독 배송 서류 준비 및 정리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 배송지옥이 넘쳐나는 회사에서 PC의 엑셀을 사용해 스마트하게 업무를 수행하는 순간이다. 이 업무의 주요 특징은 이렇다. 몸이 편안하다. 시작과 끝내는 시간의 분량 조절을 잘~ 하면 수술장 물건이 담긴 와이어로 왔다갔다하는 CCDS 수술 물품 물류업무를 제낄 수 있…… 아,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이렇게 몸이 편안하게 서류 작업을 하다 보면 묘한 잡생각과 고민이 들 때가 있다. 가령 지금의 일에 대한 생각들 말이다. 배송 지옥이니 뭐니 징징댈 때가 있어도, 내가 주체가 되어 선택하고, 내 힘으로 적응한 나의 직장이고, 업무다. 게다가 난 배송 업무가 질리지도 않고, 재미있는 동료들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며 이 일을 충분히 즐기고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언제까지 계속 배송 업무만 할 수 있을까? 그러고 싶은 걸까? 언젠가 다른 데스크 업무를 주로 하게 된다면 그 업무도 프로답게 잘 해낼 수 있을까? 더 많은 책임, 더 복잡한 업무... 그것들이 주어질 때. 나는 버텨낼 수 있을까?


회사, 그 안에서 롱런을 목표로 한다면 업무가 계속 평행선일 순 없을 것이다. 책임과, 업무의 난이도가 점차 올라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는데, 그 안에서 나의 역할과 방향성을 어떤 식으로 설정하며 실현해 나가야 할까? 어느 날 문득 팀장님이 날 불러 승진시키면서 배송 손 떼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그건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어려운 문제다. 아무튼 지금 이 순간까지 오는 길이 멀고도 험했던 만큼 나는 오래도록 이 직장에서 내 자리를 지키고 싶다. 뭐… 나중에 승진해서 업무 달라지고 그러면 그 때가서 걱정해도 늦지 않겠지. 이런저런 현실적인 고민 때문에 조금 울적해진 마음으로 엑셀 작업과 서류 정리를 끝마쳤다. 심란한 고민 속에서도 할 건 해내야 하기 때문에… 그게, 프로의, 마인드니까.


- 해프닝

CCDS 수술장 물류업무가 종료되는 시점은 그 날 하루의 마무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물건 보내는 쪽에서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수술장 물품을 한번 더 가져와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물량은 아주 소량이라 일 처리는 한 명이 필요한 상황. 차 도착시간은 우리의 퇴근시간인 5:00시에서 1시간 30분이나 더 걸리는 6:30분이라고 한다. 누군가 한 명이 초과근무를 해야 하는데 배송장 S군이 자원을 해서 이 짖굳은 월요일의 클라이맥스에 숭고한 희생을 해줬다. 퇴근 카드를 찍기 직전. 위로가 필요해 보이는 S군을 가만 둘 수 없어서 조용히 다가가 한마디를 건넸다. 그게, 리더의, 무게다.


- 퇴근

시계를 보니 오후 5시. 길고 긴 월요일이 끝났다. 이제 주말로 가기 위한 5번의 고비 중 고작 1개의 고비를 넘었을 뿐인데 나는 너무 지쳐있다. 젠장, 배도 고픈 것 같고… 그래도 회사에서의 시간은 끝났다. 그 말인 즉.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끝나고 하고 싶은 일들로 나를 충전하는 시간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하루동안 열심히 일한만큼 집에 와서는 열심히 놀 계획이다. 내 일의 프로를 넘어 인생의 프로가 되기 위해서… 나의 본격적인 월요일은 지금부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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