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새벽 두 시.
벌써 두 시간 삼십 오분째 통화는 이어지고 있고
전화기는 폭발할 것 마냥 뜨겁고, 손 목은 미친 듯이 저리고
난 깊은 한숨인지 하품인지를 참아가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응,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
"뭐가 그렇냐고? "
"그... 온라인 게임을 하느라 자기 전화를 못 받은 걸 잘못했다고..."
"아니, 자기, 이건 안 받은 게 아니라 이건 못 받은 거지.
핸드폰도 진동이었고, 내가 헤드셋 쓰고 하느라.."
"응, 토 달지 말라고? 아... 그래. "
"근데 헤드셋을 썼는데 음소거를 하라는 건 좀 무리 아닐까?"
"그래도 우리, 조금은 각자 개인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했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니..... 그런 말이 어딨어 자기.. "
"사실을 말하자면 난 그 시간에 자기가 자고 있을 줄 알았거든. "
"그래, 되도 않는 말 해본 거야, 당연히 알지... 자기 수요일에 라디오스타 보는 거. "
"근데 어제 이번 주 게스트 재미없을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
"어...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편리한 대로 기억력이 좋아서 미안해"
"그래도 아까는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한 거라서.. 내가 마음대로 연결 끊고 빠지면
사회생활에 지장이 생길 수 있는 거잖아.. 나도 실업자 되면 좋겠어? "
"아니, 그걸 그렇게 받아들이면 어떡해... "
"응, 그놈의 '아니' 소리 좀 그만하라고? 근데 아닌걸 '맞아!'라고 할 순 없잖아"
" 아.. 알지, 미안해. 자기도 힘든 거 알고말고.."
"그래, 근데 지금 자기 목소리 좀 피곤해 보인다. 안 졸려? "
"아~ 내 얘긴 피곤한 목소리도 좋다는 얘기였어! 나? 난 안 피곤하지! "
"응... 그래 나도 안 까먹었어 오늘 우리 기념일인 거. 1438일째 되는 날이잖아. "
"그래, 아까 12시 지날 때 얘기했잖아... 그럼 전화 못 받은 건 어제니까 정상 참작해주면 안 될까? "
"정말? 다행이야, 용서해줘서 고마워."
"고마움이 안 느껴진다고? 기분 탓일 거야 "
"근데 오늘 일 끝나고 어디 갈 거냐고? 아... 그게 말이야 "
"저기 핸드폰 배터리가 다 되려고 하는데..... 충전기 좀 찾아볼게 "
"응, 지금 연결하려고 찾는 중이야 "
"말 돌리는 게 아니라... 응 맞아, 내가 멀티태스킹을 잘 못해가지고 그래 "
"그럼 게임은 왜 하냐니... 재미로 하는 거지 "
"아니, 자기랑 통화하는 것도 재미있어, 정말이야."
"응, 그래, 사랑해"
"왜 사랑해를 끝인사 하는 톤으로 말하냐고? 미안, 내 보이스 톤이 원래 이래 "
"변하다니, 그런 거 아냐 "
"응, 나 다른 사람 없는 거 알잖아"
"그래 내 마음도 같아 "
"다 괜찮아, 다만... 나 지금 자도 3시간도 못 자거든.. "
"나, 내일 휴가 취소당했어. "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
"아니야, 나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
"그래서 일끝 나면 뭐할 거냐고? 흠...."
"그래, 내일은 말이지 ~ "
그녀와의 통화가 끝났을 땐, 까맣던 하늘이 하얗게 밝아져 있었다.
내가 무슨 계획으로 그녀를 납득시키고 통화를 끝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출근을 준비하며 핫식스 한 캔에 타이레놀 두 알을 입에 털어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출근 직후 탕비실 냉장고의 몬스터를 마시려다 그걸로 가글을 한 것 같기도 하고...
난 오늘을 무사히 버텨낼 수 있을까?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함께하는 즐거움은 양립될 수없는 걸까?
연애하면서 이런 걸 바라는 것 마저 내 욕심인 걸까?
수많은 고민들이 뇌리를 스친다.
단언컨대 내게 다른 사람은 없다.
확실히 그녀는 내게 사람 중에 최고 우선순위다.
사. 람. 중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퇴근 후 시간, 주말 시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쓸 수 있는
휴식과 자유라는 매혹적인 대상과 경쟁을 붙여도 여전히 그녀가
최고 우선순위 일지는 1438일째 기념일이 되는 오늘에 와선 장담 못하겠다.
애초에 이런 기념일 단위가 지구 상 다른 연인들에게도 존재하는지가 의문이지만..
"아니, 농담 아니고 지금 나 진짜 피곤해 뒤질 것 같다..."라고 생각할 찰나
아뿔싸 싶어 시계를 본다.
시간은 낮 열 두시, 회사의 점심시간.
눈 좀 붙이려는 소박한 계획을 비웃듯이 핸드폰이 울린다.
내 점심 스케줄을 파악하고 점심시간이 시작하자마자 전화를 걸
상대는 보나 마나 한 명 밖에 없다.
생존을 위한 반사신경이랄까? 재빠르게 통화 수신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내 입에선 여보세요 라는 무의미하고 의례적인 인사겸 의문사 대신
엉뚱한 인사말이 혀끝에서 나오기 직전이다.
"근데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