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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냥이 Dec 03. 2021

차선책의 블루

알록달록한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내가 어릴 때, 파워레인저라는 특촬물이 유행했었다. 

이 시리즈는 종류도 컨셉도 다양하게 발전하며

요즘까지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는 모양이지만

내 시절 파워레인저 하면 역시 무-적 파워레인저였다.


대충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조던이라는 머리 큰 리더 같은 놈에게 

선택받은 10대 외국 사람같은 형,누나들이

원시시대 공룡, 동물들의 힘을 이어받아 

무적의 전사인 파워레인저로 변신한다.


원색쫄쫄이를 입은 이 지구의 용사들은 

지구를 침략하는 악의 세력에 맞서 박터지게 

싸운다는 뻔한 이야기지만 .. 재밋었다! 


매 화마다 미국 틴에이지 시트콤 같은 메인 스토리와

알록달록한 코스튬으로 변신해 싸우는 액션 볼거리.

클라이막스에 거대로봇과 거대괴수가 맡붙는 스펙타클까지.

 그 시절 공룡, 괴수, 로봇을 좋아하던

어린 소년이 도무지 안 좋아할 수가 없는 조미료를 

전부 때려박아 빚어낸... 어찌보면 마스터 피스랄까 ?


주인공들이 변신하는 컨셉과 색깔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티라노가 레드, 트리케라톱스가 블루.

맘모스가 블랙, 호랑이가 옐로, 익룡이 핑크였을거다.

(참내, 이걸 아직도 외우고 있다..)


아무튼 초등학교도 아직 안 가는 꼬마였을 시절에

동네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이면 

우리는 이 파워레인저 놀이를 했었다.

역활을 나눠서 가상의 적과 싸우고 하는 단순한 놀이.


그 놀이를 시작 할 때면 항상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꼬마들이 대장격인 레드를 놓고 하는 레드레인저 쟁탈전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들은 서로서로 자기가 레드를 하고 싶어했다.

누가 먼저 레드를 찜해놨네, 내가 선픽을 했네 하면서

우선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교착상태가 오거나

추해질 정도로 누군가 떼를 쓰거나, 싸움이 날 것 같으면

결국 누군가 양보하거나

세상 최고로 공평한 게임인 가위바위보로 결정을 했다. 


그 와중에 놀이의 시작부터 레드에 눈길도 안주고

나는 그냥 블루를 하겠다고 의사를 표명해

경쟁에서 한 발 물러나 평화롭게 소소한 소임을 맡는

승부욕 없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나였다.


나라고 레드가 가장 멋있는걸 모르지는 않았지만

레드가 다섯 명인 파워레인저는 애초에 불가능하다는걸

어렴풋이 알기에 차선책으로 블루를 최선책인것 마냥 선택한 것이다. 


어쩌면 틈새시장과 비슷한 뜻인 블루오션이라는 

말의 기원이 여기서 비롯된걸지도 모르겠다.


그 때.. 블루를 나의 색으로 결정한 것은

지금 돌아보면 어른스런 양보 같은것과는 거리가 먼 

경쟁상황에 대한 회피이자, 강자에 대한 굴복이었을거다.

나는 유년기부터 그 나름의 비겁함을 습득한것이겠지. 


아무튼 난 블루레인저를 선택하면서 배운 

그 비겁함으로 살아오면서 수차례...

살아남기 위한 약자의 선택이란 것을 여러번 거듭해왔다. 

그러다보니 모험심과 패기, 도전정신, 승부욕이라는게 

많이 결여된 비겁한 인간이 되어버린건 아닐까 ? 


그래.. 언젠간 나도 뜨겁게 레드레인저를 갈망하며 

내 삶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싶은 욕망이 ...지금와선 별로 안 생긴다.


이거 다 쓰고나니까

내가 참 별로인것 처럼 느껴진다.

이런 인간이라 실망했다면 미안하다.


하지만 마이클베이 감독의 영화 트랜스포머2에서 주인공 오토봇들에게 

패배하고 달아나는 악당의 리더 메가트론에게 부하 스타스크림은 이런 말을 했다.


"때로는 겁쟁이가 생존하는 법입니다." 라고.. ㅋ 


이런 자기변호도 별로 같아서 힘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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