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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소리 불편해 보여

드라마 <또 오해영>의 그 문장



“신발 바꿔 신어, 발소리 불편해 보여”

- 드라마 <또 오해영>



# 예쁘기만 하고 작은 신발

<나의 아저씨>로 내 마음을 뺏은 박해영 작가의 전혀 다른 성격의 드라마 <또 오해영>은 취향저격이다. 에피소드 중 하나로 예쁘기만 한 작은 신발 이야기가 나온다. 헤어진 남녀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감정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남자는 이런 대사를 친다.


 "신발 바꿔 신어, 발소리 불편해 보여"  


그리고 이어지는 여자의 독백.


‘하루 종일 작아서 불편한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면 그 사람 생각을 덜 하게 돼요. 신경이 온통 발에 가 있으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으면 아주 잠시나마 행복해져요.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당신에 대한 기억 때문에..... 정말 어이없는 곳에서 당신이 생각나 조용히 무너질 때마다 아파라, 아파라, 더 아파라!' 


마음이 아픈 것보다 차라리 발이 아픈 게 덜 고통스러운 주인공은 예쁘기만 하고 작은 신발을 신고 아픔을 자초하며 하루를 보낸다. 참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신발'에 빗대 표현한 이 장면은 오래도록 남는다.  



# 아파라, 아파라,  나의 하이힐

하이힐을 신고 종일 돌아다니던 나의 첫날의 추억은 유쾌하지 않다.  남이 신은 하이힐은 이쁜 것만 보이더니  내가 신은 하이힐은 시간이 갈수록 고통만 남았다.  '아파라, 아파라, 너무 아파라', 하이힐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컴컴한 저녁 무렵, 결국 버스정류장부터 집까지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돌아와야 했다. 맨발로 아스팔트를 돌아다녀 스타킹은 다 찢어져 엉망진창이고 주변의 시선도 느껴졌지만 그보다 내 발가락 고통이 훨씬 커서 체면 따위를 신경 쓸 수 없었다. 빨갛게 달아오른 불쌍한 내 발가락들. 아파라, 아파라,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고통들이여~ 지금도 그때 내 발의 통증이 생각난다. 이제 하이힐은 엄두도 못 내고 편한 신발이 최고! 운동화만 찾는다.  



# 장면 1. 강가의 신발

신발 하면 떠오르는 장면 하나는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하는 강가에 놓인 덩그러니 놓인 신발.  누군가의 자살을 암시한다. 이 장면을 볼 때마다 물에 빠져 죽는 사람들은 왜 신발을 벗어놓고 죽을까?  궁금했다. 그 정도로 독하게 죽음을 작정했다면 아무것도 안 남겼을 텐데, 왜 신발을 남겨 놓은 것일까. 신발이 무거워서 그랬나? 아니면 누군가는 나의 죽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마지막 순간, 신발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나의 분신으로 여긴 걸까? 아직 그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하지만 내 마음속 한편에 신발의 상징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 장면 2. 휴먼 다큐 속 신발

휴먼 다큐를 제작할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휴먼 다큐는 암묵적으로 혼자나 부부만 있는 단출한 가족보다 아이들도 나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을 선호한다. 방송식 용어로 잘 팔리는 '아이템'. 방송이 그리는 가족이란 인간냄새나는 화목한 가족이기에,  제작진 입장에서도 대가족이 나오면 다양한 에피소드를 끌어내기 쉽고, 시각적으로도 화목한 분위기가 훨씬 잘 산다. 그중 빠지지 않는 건 밥 먹는 장면. 카메라가 어색한 일반인들은 밥 먹을 때 가장 자연스럽다. 또 음식이 있을 때 화기애애해한 분위기가 잘 산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장면은 출입구의 놓인 가족들의 신발 컷. 크기도, 색깔도, 모양도 다른 여러 개의 신발이 함께 놓인 장면이 내 눈엔 더 아름답고,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화목한 가족을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피디들한테도 꼭 찍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이런 신~발!!! 장면이 나만의 최애 씬이다.  




# 장면 3. 내 발보다 더 크게, 아이들의 신발

아이들은 자기 발보다 훨~씬 큰 어른들의 신발 신는 걸 좋아한다. 우리 아이 클 때도 그랬고, 조카도 어릴 적에 자기 엄마 뾰족구두나 할머니 구두를 신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옆에서 그걸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어른들은 혹시나 커서 벗겨지거나 넘어질까 어쩔까 걱정하는 표정으로 지켜보지만, 정작 아이들의 표정은 사뭇 다르다. 자기 발보다 훨씬 큰 신발을 신고 아슬아슬,  뒤뚱뒤뚱 걸어가지만 뭔가 큰일을 해낸 듯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란. 그 의기양양한 그 표정에서 '이거 봐~ 나 완전 어른 같지!'라는 속마음을 읽는다. 나는. 아마도 아이들이 자기 신발보다 훨~씬 큰 신발을 신고 자랑스러워하는 건,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픈 마음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혼자 보기 아까운 아름다운 신발 씬이다.  



# 내 발에 맞는 신발

신발이 마치 내 삶의 크기만 같다. 원래 내 발 사이즈가 235인데 분수에 안 맞게 한 치수만 커도 허덕이고,  예뻐서 한 치수만 작게 신어도 불편함을 오래 참을 수 없다. 어쩌면 나이 들수록 중요한 건, 내 삶의 크기만큼 딱 맞는 내 신발 치수를 잘 기억하는 일이 아닐까. 남이 어떻게 볼까 보다 만족도 높은 삶을 살기 위한 첫 번째 기준은 나를 아는 일인 듯싶다. 친구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자기 체력을 기가 막히게 알아서 주말 나들이는 자제하고 주중에만 온 힘을 다하는 친구. 자기 좋아하는 일을 확실히 알기에 나머지를 포기할 줄 아는 친구. 그런데 가끔 나는 내(신발 치수)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고 무모하게 저지른 일로 허덕이곤 한다. 시간도, 체력도, 열정도 주체 못 해 쩔쩔매는 나. 이건 내 신발 치수도 모르는 것과 뭐가 다른가. 큰 신발 신고 벗겨질라 헐떡이지 말고, 꼭 끼는 작은 신발 신고 당황하며 어쩔 줄 모르지 말고 내 신발 크기 같은 내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 그것이 행복의 입구가 아닐는지. 그 옛날 성인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너 (신발 사이즈) 자신을 알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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