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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시와 산책> 한정원 작가의 그 문장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 한정원, <시와 산책>-


# 가끔 꾸는 시즌제 악몽

가끔씩 꾸는 악몽이 있다. 얼굴 구분이 안 가는 흐릿한 이미지의 남학생. 뒷줄에 앉은 그 남학생이 쳐다보면 어쩔 줄 모르는 나. 넓은 교실에 다른 사람은 안 보이고 쩔쩔매는 나는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내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다. 이건 내가 꾸는 시즌제 악몽이다. 입시 시즌이면 자주 꾸었던 악몽. 이 악몽은 대학입시 날 일어난 실화이기도 하다.



# 악몽은 실화

대학 입시 날, 점심을 먹고 3교시가 시작되기 직전. 내 뒷줄에 앉은 남학생이 나의 등을 툭툭 치길래 뒤돌아보았더니 너무 멀쩡한 얼굴로 다음 시간 시험지 답을 보여달란다. '뭐?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잠시 '멍'한 상태였다가 뭔가는 해야 했다. 말이 되어 나오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졌지만 ".... 싫어요"라고 거절한 후 뒤돌아 앉으면서부터 심장이 쿵쾅거리며 떨렸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선생님이 말씀해주셨는데 내 일이 될 줄이야. 학력고사 시절, 딱 한 번뿐인 기회. 보여주다 걸리면 난 부정 처리될 것이고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텐데. 무섭다고 보여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감독 선생님한테 이르는 일은 더욱 먼 나라의 일이고. 난 뒤돌아 볼 수도,  화장실에 갈 수도,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 남은 점심시간이 너무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 신경은 온통 보이지 않는 등 뒤로 쏠려 있는데, 남자아이는 별다른 말 없이 뭔가 커터 칼 같은 걸 올렸다 내렸다 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드르륵, 드르륵....... 알 수 없는 규칙적인 소리의 공포감. 그렇다고 뒤돌아볼 수도,  감독관에게 이를 수도, 그날 처음 본 다른 아이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그 교실에 여학생은 단 둘뿐. 나머지 시간의 시험을 어떻게 치렀는지 전혀 모르겠다.  



#엄마가 거기에 있어

시험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내 뒤에 남자아이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뛰다시피 교문 밖을 나섰다. 힘껏 달리고 싶었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발이 땅에 닿는지 어떤지 알 수 없는데 저 멀리 엄마 얼굴이 보였다. 원래 집에서 기다리기로 한 엄마가 그 추운 날, 대학 교문 앞에서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엄마를 보자마자 그냥 그 자리에서 털석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내가 시험을 못 봐서 우는 줄 알고 괜찮다고 했지만. 예상치 못한 그날의 사건을 난 오래도록 말하지 못했다.



# 입시에 떨어지고 폐인처럼

그렇게 대학에 떨어졌다. 생각지 못한 내 인생의 첫 실패.  비슷한 성적의 친한 친구들은 다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나만 불합격된 현실 앞에서 '패배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당시 심각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먹지도 자지도 않고 미치기 직전의 상태. 공부 때문에 속 썩인 적이 없던 딸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엄마는 혼자 노심초사하면서도 닦달도 하지 않고 담담히 지켜보셨지만, 한밤중 나 몰래 우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숨죽인 엄마의 울음소리는 지금도 생생하다.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정신줄을 놓고 지내던 날들. 누군가 대신 후기 대학에 원서를 넣어 주었고, 어느 날 떠밀려서 대학 시험을 봤다. 나 대신 친구가 학교를 가 확인하고 합격소식을 전해주었다. 막상 대학에 가서는 사건 따위는 잊고 별일 없이 잘 적응하며 지냈다.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미팅도 열심히 하고, 학교 방송국에 들어가 바쁘게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 지워지지 않는 악몽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학교를 가다 이유 없이 길에서 쓰러지는 바람에 엄마가 데리러 온 적도 있고 때때로 악몽 속 남학생이 나타나곤 했다. 입시 때만 되면 신병을 앓듯 시름시름 앓았다. 평탄하게 살다 겪은 입시 날의 트라우마. 내 탓은 아닌 일인데. 꼭 그것 때문에 첫 입시에 실패한 것도 아닐 텐데. 19살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는지, 누구한테도 말하지 못하고 피하려고만 해왔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그날을 떠올리기가 싫었고,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서 잊으려고만 애써왔는데. 만약, 정면 승부를 했다면 고통이 일찍 끝났을까.


예전처럼 악몽을 자주 꾸지는 않는다. 이상하게 그날의 교실과 분위기는 선명한데 그 남학생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얼굴만 흐릿하게 지워져 있다. 그렇다고 악몽이 사라진 건 아니다. 입시날이면 여전히 그때 일이 생각나지만 예전만큼 아프지 않고 남한테도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 그런 일도 있었어'라고. 그건 아마도 한정원 작가의 문장처럼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는 증거일지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 친구의  5월

나의 입시날이 그렇듯, 친구의 5월도 그렇다. 친구의 동생은 30대 후반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힘든 일은 다른 사람과 나누기가 힘든 법. 동생이 많이 아프다는 걸 친구들에게 자세히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 앓았던 친구. 부모님이 병간호를 힘들어하자, 친구는 회사까지 그만두고 동생의 병간호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고, 마지막 2달을 호스피스에서 보내던 친구 동생은 5월의 어느 날, 하늘나라로 갔다.  


친구 동생은 같은 봉사단체에서 활동한 후배이기도 하다. 매주 일요일 봉사활동을 하고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면 봉활을 떠났던 사이. 혼자라면 가지도 않았을 곳을 가고, 하지 않았을 일을 함께하며 청춘을 보냈기에 추억도 많다. 같이 찍은 사진들이 그때의 세월을 소환한다. 지금은 우리의 아지트였던 장소도,  청년 봉사단체도 사라졌지만 함께 청춘을 보냈기에 녀석과의 추억도 곱게 간직되어 있다.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하늘나라로 떠난 5월의 장례식 날. 친구는 동생의 죽음 앞에서도 마음껏 슬퍼할 수도, 맘껏 울 수도 없었다. 한없이 슬퍼하는 부모님 곁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더욱더 단단해져야 했던 친구. 쓰러질 듯 위태롭던 그날의 친구 모습이 선명하다. 이후로도 친구는 한동안 장례식을 못 가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의 고통을 알았기에, 오히려 아는 척도 못하고 '괜찮냐'라고 용기 내어 물어보지도 못했다. 그 점이 오랫동안 참 미안했다.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동생을 보러 가자고 용기 내어 말할 수 있었다. '세월이 약'이라더니,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가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나는 안다. 여전히 흐릿한 나의 악몽처럼 누군가의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정원 작가의  문장처럼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이 문장을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었다.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나의 입시날의 사건 위에, 친구의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고. 비록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등장할 지라도. 만약, 누군가 말하기조차 힘든 고통이 있다면 이 문장을 곱게 접어 선물하고 싶다. 당신의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갈 거라고.



다시 찾아오는 5월. 눈부시게 푸르른 날, 세상을 떠나 영원히 젊은 오빠로 남아있는 그 아이를 만나러 친구와 함께 가야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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