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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담배,속담배,나의 해방일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작가의 그 문장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1. 나, 담배 냄새를 잘 맡지


어디서든 담배 냄새 하나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담배 냄새가 나면 코가 간지럽고 나도 모르게 재채기가 나온다. '누가 담배 피우는구나'. 그건, 하고많은 알레르기 중 담배 알레르기. 귀신같이 담배 냄새를 맡고 담배 알레르기도 있건만, 담배를 피워본 적이 있다.


대학 방송반을 할 때 매일 아침 운동장을 돌고(왜 필요한지 지금도 이해 안 되는데) 이상한 군대식 문화에 반기를 들다 속상해서. 그리고 방송국에 들어간 후 몇 번. 방송은 늘 시간과의 잔인한 싸움이라  긴장의 연속인데 스트레스를 풀 시간이 없다. 가장 시간 적게 들고 간단히 선택할 수 있는 건 역시 담배다.  하지만 약한 기관지 탓에 몇 대 피면 하루를 꼬박 누워있어야 하는 저질 몸 때문에 담배는 스트레스 해소가 되지 못하고 말았다. 담배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               




2. 그 피디의 겉담배

 

담배가 해방구가 되기는 피디들도 마찬가지. 편집이 안 풀릴 때마다 담배를 피우러 유난히 들락날락 거리는 피디 있어서 같이 따라나섰다. 방송국 기다란 계단에 서서 한참을 얘기하다 처다 봤더니, 멋들어지게 담배를 피우는 것 같더니만 좀 이상하다. 입으로 피운 담배 연기가 코로 나오는데, 옅고 푸르스름한 연기라. 응? 이건 뭐지? 익숙하게 보던 뾰얗고 뭉게뭉게 구름 같던 연기의 질감과는 뭔가 다른 연기였다. 그리고 알았다.

     

“겉담배 피우죠?”   

“.... 어떻게 알아요?”

“ 음..... 연기 색깔이 달라요” 


편집 안 될 때마다 그렇게 생각할 게 많다고 담배 피우러 나가던 이 피디 양반. 알고 보니 겉담배였어.  엄청 골초처럼 굴었는데 이게 뭐람. 담배 하나도 제대로 속으로 담았다 뿜어내지 못하는, 속담배를 못 피우는 사람이었다니.           




3.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가 끝났다


애정 하던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6부가 끝났다. 촌스러운 삼 남매와 구 씨의 이야기는 처음에 느리게 전개되더니 4화에서 구 씨의 초능력적인 넓이 뛰기, 창희와 구 씨의 미친 추격씬,  초록색 소주병이 뿜어내는 영롱한 광채 등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과 예상을 뛰어넘는 전개를 보여주었다.  


주인공들은 이렇게 말이 없어도 되나 싶게 한 마디도 안 하다가 말을 한번 시작하면, 폭풍이다. 이른바 말 많러들. 그들의 입에서 ‘추앙’이니 ‘해방’, '환대' 같은 생경한 연극 대사 같은 단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낯선 드라마. 사전에나 등장할 법한 단어가 튀어나오는데, 이를 외면할 줄 알았는데 여기저기서 '추앙 신드롬'이다. '사랑'보다 사람을 더 채워준다는 '추앙'이 뭔지. 어느 사이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추앙'이란 단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  


드라마는 사건으로, 기승전결로 연결되는 게 문법인데 특별한  사건이 없이 흘러간다. 멀리 떨어진 경기도 산포시에서 서울로 출, 퇴근하고 친구와 술 마시고 수다떨고 가족과 밥 먹는 장면이 유난히 많이 나온다. 우리 일상의 한 장면을 숟가락으로 뚝 떼어다 놓은 듯한 장면들. 그래서 익숙하고 그래서  낯설고. 또 낯선 듯 익숙한 뫼비우스의 띠같은 드라마. 그런데 왜 나는 자꾸 끌리고 보고 나면 곱씹게 되는 것인가. 몇 가지 장면들이 생각난다.




4. 죽음으로 느낀 엄마의 존재감


13화. 밥하던 엄마가 갑자기 죽는다. 그동안 엄마의 존재는 미미했고 엄마의 감정도 제대로 헤아려 본 적도 없다. 심지어 가족한테 '엄마' 외에 이름이 불린 적이 없어서 유골함에서야 엄마의 이름(곽혜숙) 이 드러난다. 보이지 않게 가족을 연결하는'접착제' 같던 엄마의 부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밥상이다. 늘 구 씨에게 가져다줬던 고구마 줄기 같은 엄마표 반찬이 사라진 빈약한 밥상.  


“우리 집은 캠핑장이야”      


선배 작가가 엄마가 돌아가신 후, 한 말이 생각난다. 딸들과 아버지가 사는 집에서 엄마의 부재를 제일 느끼게 한 건 밥상이라고 했다.  엄마 반찬이 사라진 후, 가족들이 할 수 있는 요리란, 스팸과 달걀 등 캠핑장에서나 먹는 그런 음식들이었다며, 자기네 집 식탁을 '캠핑장'이라고 표현했다.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엄마 잃은 '슬픔'보다 먼저 다가오는 현실은, 엄마 손맛이 나는 엄마표 반찬이 사라진 '빈약한 밥상'이다. 온전한 현실의 이야기였건만, 생각해 본 적 없는 진짜 현실이 드라마에 있다.


깜짝 놀란 장면은 또 있다. 엄마의 뼛가루 속에 들어있던 '인공관절'. 얼마 전 화장터에서 내가 겪은 일이었다.  곱게 갈린 뼛가루 속에 생뚱맞은 철제 물건이 있었는데, 아버님의 인공관절이었다. 그때, 똑같이 물었다.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어쩜 이렇게 현실의 복사판인지. 가족들은 이때 또 한 번 누군가의 부재를 실감한다.   




5. 두 남자 - 늘 경계태세인 구 씨 & 어른이 되어가는 창희

      

드라마를 보면서 두 남자의 감정을 따라가게 되었다. 환멸을 느낄 정도로 사람이 싫은 게 어떤 느낌일까.  씨는 자신을 1로 표현한다. 눈앞에 사람이 왔다 갔다만 해도 거슬리는 자신은 1이며,  1은 늘 경계태세라고. 아침부터 머릿속으로 쳐들어오는 사람을 때려눕히느라고 술을 마신다는 구 씨. 혼자 있는 사람조차 거슬릴 정도로 사람이 싫다는 건 뒤집어 생각하면, 사람 때문에 얼마나 상처받고 외로운 영혼이었는지를 말한다.  드라마에는 외롭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자리를 섬세하게 짚어보는 마음이 속속들이 들어있다.           


너무 말 많고 투덜대고 철딱서니 없어 보였던 창희. 그는 엄마의 죽음 이후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릴 줄  아는 아들이다. 아버지와 밥상을 마주하며 이대로 둘이 늙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재혼까지 추진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자동차를 위해 무릎을 꿇는 속물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자기 차라고 허세를 떨지 않는 솔직함이 있다.


창희는 늘 자기가 있을 자리를 귀신같이 알고 먼저 앉아있는 놈이라고 자신을 말하며 할머니 임종과 엄마의 임종을, 그리고 우연히 혁수 형의 임종을 지킨다. 한 순간을 위해, 많은 재산을 포기하고도 떠들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으로 삼킬 줄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촐싹대던 첫인상을 그대로 정형화한 인물로 끌고 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개과천선하는 인물로 그리지도 않는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결을 살려놓음으로써 가장 이해되는 현실적인 인물로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6. 속담배 같은 드라마 같으니라고!      


누군가는 ‘추앙’과 ‘해방’을 기억한다면, 나는 이처럼 다양한 사람들의 '고통'에 주목하는 ‘깊이 있는’ 작가의 눈을 보고 싶다. 작가는 예전에 그 피디양반이 내뿜던 '겉담배'처럼 사건만 나열하지 않는다. 사람들을 훑고 지나가지도 않는다. 서사와 정보로만 채워 사람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이 지나간 '외길'만 따라가지 않고, 작가가 파놓은 '여러 개의 미로'를 따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착각이 들게끔 한다.  


수더분함에 감춘 추앙으로 자신을 채우고 싶은 미정이의 모습, 1의 경계태세를 벗고 달라지고 싶은 구 씨, 사랑받고 싶은 기정이, 엄마의 죽음으로 부재를 처음 겪는 가족들의 감정을, 동생과 조카를 동시에 놓치고 싶지 않았을 심술궂어 보이는 인물까지. 좋다,나쁘다로 선긋지 않고  마음이 들여다 보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섬세하게 표현했을까. 들의 감정을 따라 깊이 들이마시고 공감한 후, 내뱉는 모습이 마치 '속담배' 같다.  뒤집어 보면, 인물들의  '고통'을 따라가며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으며 함께 아파했을 작가의 고통의 순간들을 생각하게 한다.


내게 작품의 깊이란 곧 ‘인간 이해’의 깊이다. 
인간의 무엇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인가.
나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평범한 답을 말할 것이다.

신형철 평론가의 말처럼 어떻게 '타인의 고통'에 공감 없이 인간을 깊이 이해할 수 있을까. 깊이 있는 작품의 탄생은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이고,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그마저 내가 경험한 고통을 벗어나지 못해 늘 한심한 한계를 늘 겪을 테지만.

 

이런 속담배 같은 드라마 같으니라고!!  (끝.)   (이런 노담시대에 ㅠㅠ)

      



AND <내가 사랑한 드라마의 단어들>      


-추앙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날 추앙해요.

추앙은 어떻게 하는 건대?

응원하는 거. 넌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 좋기만 한 사람

내가 좋아하는 것 같은 사람들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불편한 구석이 있어요. 실망스러웠던 것도 있고, 미운 것도 있고, 질투하는 것도 있고, 조금씩 다 앙금이 있어요.     


- 괜찮은 시간

하루 24시간 중에 괜찮은 시간은 한두 시간 되나? 나머지는 다 견디는 시간, 하는 일 없이 지쳐. 그래서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 하루  5분

하루에 설레는 순간들 끌어모아서 하루에 5분만 채워보라는데, 오늘은 아직 1초도 시작 못했는데. 말하다 보니 지금 살짝 3초 설렜습니다.     


- 나 여기 있어

세 명 보내봐서 아는데... 갈 때 엄청 편해진다. 그러니까 형 겁먹지 말고 편하게 가볍게 가. 나 여기 있어.     


- 환대

아침마다 찾아오는 사람한테 그렇게 웃어. 그렇게 환대해. 형 환대할게. 환대할 테니까 살아서 보자.   


- 사랑

사랑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게 사랑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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