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tto Mar 08. 2021

지겨운 청담동 커피숍

아흔여덟 번째 소개팅

토요일 오후 한 시 반, 강남구 청담동 세로수길 어드메에 위치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친한 회사 언니가 자기 남편의 친구라며 만나보라고 했다. 뭐 하나 빠지는 거는 없는데 이상하게 여자를 못 만나는 녀석이란다.

그래, 만나보자. 내 처지에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지.


그는 먼저 와 있었다.

멀찌감치 보이는 뒷모습에서 한눈에 푸근한 스타일임을 알 수 있었다.

'자기 관리가 안되시는 분이군'

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천천히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소개받은 ㅇㅇ입니다."

"안녕하세요"

...

딱 3초면 된다. 면접이든 소개팅이든 3초 안에 상대의 마음을 훔치지 못하면 그 게임은 승산이 없다.

이미 훈련된 스캐닝 기술을 가진 나는 유난히 발달된 시력으로 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그를 훑었다.


우선 주문을 했다.

이 집은 오징어 먹물 파스타가 맛있는 집이라며 그는 먹물 파스타를, 나는 평소대로 봉골레를 시켰다.

그리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는 강남에서 초중고를 다니고 명문대를 졸업한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네 살 차이.

"저 근데... 한쪽 셔츠 소매 단추가 풀어져있어요."

"아 이건... 그러니까 저의 아이덴티티예요."

"네... 눼?!"

그것은 잭슨 형님의 스타일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마이클 잭슨 팬클럽 한국지부 회장님이었다.

어쩔... 


이런저런 의미 없는 대화들이 오고 가는 사이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그가 주문한 오징어 먹물 파스타는 유난히 국물까지 시꺼맸다. 맛집이라 재료를 듬뿍 사용했나 보다.

잠시 동안 말없이 스파게티만 먹었다. 후루룩 짭짭. 귀에 거슬리는 쩝쩝대는 소리. 아 듣기 싫어.

한 참을 먹다가 반쯤 먹었을 때 그가 운을 뗐다.

"ㅇㅇ 씨도 드셔 보실래요?" 라며 내게 그릇을 건네길래 손을 내미는 순간,

'헉, 깜짝아!'

시꺼멓다. 그의 시꺼먼 입 주변과 치아. 이 사이사이에 낀 먹물이 둘리 친구 마이콜을 연상케 했다.

오징어 먹물이 잔뜩 묻은 입으로 내게 그릇을 건네며 시식을 권유하고 있는 그.

'오 마이 갓. 나보고 지금 이걸 먹으라고?'

"괜찮아요, 제 것도 다 못 먹어낼 것 같아서요."라고 사양했다.

그는 옆에 있던 냅킨으로 대충 입을 쓱~ 닦았다. 꾸깃꾸깃 시커메진 휴지조각이 나뒹굴었다.


커피를 마시자며 일어선 그는 하이힐을 신은 나와 키가 고만고만 비슷했다. 아니 조금 작은 것 같았다.

커피값은 내가 내야 하니까 강남 토박이인 그가 안내하는 곳으로 순순히 따라갔다.

'아 그냥 더치페이할걸, 가서 또 무슨 얘기를 하나... 가기 싫다...'

30분 정도 흘렀을 때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이번엔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아직도 이 사이에 먹물이 채 빠지지 않은 그의 입을 차마 더 볼 수는 없었기에 한사코 거절했다.

주변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들렀다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갔다.


월요일 오전 출근하여 주선자 언니에게 소개팅 피드백을 했다.

"언니, 아니 괜찮은데... 그 사람이 오징어 먹물 파스타를 시켰어... 근데 그게 이 사이사이에 다 껴서 헤어질 때까지 안 빠지는 거야... 근데 그 시꺼먼 입으로 자꾸 나한테 말을 걸잖아... 언닌 그럼 좋아?"

"뭐? 아하하하하하하하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부는 친구에게

'야 이 자식아, 왜 소개팅에 나가서 먹물을 먹어!! 그건 니 혼자 먹고 싶을 때나 먹으라고 쫌!'라고 했다며 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단다. 뭐 형부가 미안할 일은 아니지.


청담동 커피숍이 지겹던 날들.




이전 01화 K 장녀에게 바치는 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