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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tto Mar 24. 2021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이상하게 난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좋은 것이 싫은 것이 있어도 내색하기를 꺼려하는 아이였다. 어렸을 때는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는데도 그냥 꾹 참고 돌아선 기억들이 많다. 예를 들면 피아노 연습이 하기 싫은데 하기 싫다고 말하지 못하고 계속한 것, 처음 보는 어른이 나를 귀엽다고 머리를 쓰다듬거나 몸을 만지면 싫다고 말하지 못한 것, 버스를 타면 이유 없이 쳐다보는 불편한 시선에 저항하지 못한 것 등. 한 번은 사촌언니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하나 남은 과자를 먹지 않고 동생에게 양보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한 적이 있다. 나도 철부지 아이였으니 당연히 먹고 싶었을 테지만 보는 눈이 있으니 그렇게 했었을 거다.


17개월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거의 연년생 동생과 아주 어렸을 때 엄마 손을 잡고 어디를 가면 동생은 항상 유모차를 타고 나는 걸어 다녀야 했다. 다리가 아팠고 정말 걷기 싫었다. 그냥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엄마는 날 그렇게 항상 데리고 다니면서 걸으라고 했다. 하루는 내가 "엄마, 나도 아직 애기야!"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얘기를 지금도 가끔 하시는 걸 보면 좀 충격이었나 보다. 신기한 건 내가 아주 어렸을 적의 일인데 그때의 그 느낌이 기억이 난다는 거다.


엄마 말로는 나는 좀 예민해서 키우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사춘기 때는 내적 갈등이 심해서 말 붙이기도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근데 엄마가 좀 어려워서 그랬다. 나의 감정이 충분히 수용받고 공감받고 있다는 느낌이 없어서 이런 감정을 드러내거나 말로 하면 왠지 혼나기만 할 것 같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친구여 안녕'이라는 어린이 소설을 읽고 교실 뒤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다. 선생님이 깜짝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시는데 나는 대답도 못하고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학기가 끝나고 생활기록부에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눈물이 많으며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고 쓰여있었다. 어릴 적 나는 내 수많은 감정들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서툴렀기에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눈물을 흘려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이가 중고등학교 시절을 오직 입시와 씨름만 하며 보내고 대학생이 되자 묵혔던 감정들이 무장해제되어 폭발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관계를 맺을 때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는데 특히 연애를 시작하던 20대 초반에는 감정의 노예로 질질 끌려다니기도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연애를 할 때는 복잡한 오만가지 감정들을 다 겪게 된다. 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어떤 것을 표현하고 어떤 것을 감추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왜 이렇게 서툴까. 이런 건 어디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워야 하는 건지를 몰라 한참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다 나이만 잔뜩 먹은 어느 한 날, 청년부 목사님과 상담을 할 일이 생겼다. 그때 나는 나의 복잡한 심경을 장장 두 시간에 걸쳐 털어놓았는데 듣던 중 목사님 왈,

"ㅇㅇ야,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두 감정을 분리시켜서 생각해봐. 미안하다고 거절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 그 사람이 고마우면 보답하면 되는 거야. 다른 방법으로."


아 나는 그때 살면서 그런 건 처음 배웠다. 혼자 깨달을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이렇게 나의 내면의 아이는 조금 늦게 천천히 자랐다. 이 사실을 배우고 나니 한결 관계 맺음이 수월해졌다. 나의 감정을 상대에게 올바로 전달하고 무례하지 않게 거절하는 법. 지금까지도 세상 감사한 조언이다.


우리 아이는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어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두세 번을 반복해서 물어봐도 대답은 같다. 이유를 물어보니 "ㅇㅇ이 조금 피곤해, 친구 만나는 거보다 집에서 슈퍼윙스랑 노는 게 더 좋아."라고 말했다. 친구들과 만나게 해주고 싶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은 엄마의 욕심이고 욕구 충족일 수 있다는 생각에 아이의 말을 그냥 들어주었다. 그리고 저렇게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해 준 아이가 참 고맙다.


동시에 우리 엄마도 나한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어 그랬겠지. 그리고 내가 말하지 않아 좀 답답했겠다...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아이가 자랐을 때 예전의 나처럼 여러 감정 속에 헤매지 않도록 충분히 아이의 감정을 수용해주는 엄마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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