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tto Mar 12. 2021

그녀는 맥시멀리스트

K장녀, 나와 엄마의 이야기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단연 으뜸인 맥시멀리스트다. 거실 장식장에는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장식물들이 넘쳐나고 부엌 아일랜드 식탁에는 작은 상점을 연상케 하는 먹을 것들이 한가득 진열되어 있다. 냉장고는  자리가 없고 냉동실은 문을 열면 좌르르 쏟아질 정도로   있다. 안방 화장대는 같은 종류의 화장품이 기본 두세 개는 있고 그중 손이 닿지 않는 곳은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다. 옷장이나 약장 등은  것도 없다.


평소 그녀가 들고 다니는 가방은 천 근이다. 그 가방은 없는 게 없는 만물상이다. 종이와 펜, 휴지, 밴드, 손톱깎이는 물론이고 실과 바늘도 들어있다. 언제 어디서나 그 가방 하나만 있으면 잠도 잘 수 있고 당장 옷 수선집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 길거리 노숙하는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모든 걸 짊어지고 다니는지 그 작은 어깨에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여 물었다. "왜 이렇게 많은 걸 매일 들고 다니는 거야?" 돌아온 대답은 "너네 셋 키울 때 항상 시간이 없고 바빠서 필요할 때 바로바로 챙겨주려다 보니 그런 거지, 자 이거 봐 지금도 체하니까 바로 딸 수 있잖아"라며 바늘로 내 엄지손가락을 따 주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은 살짝 비친 눈물을 가리기 위함이었지만.


서른이 좀 넘었을 때 본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만의 독립공간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나의 집에 와 본 엄마는 말했다. "아이고 니 성격대로 딱 해놨네." 나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 나는 정리정돈에는 좀 일가견이 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하기 전에는 항상 책상부터 정리하고 시작했다. 별 일이 없어도 항상 방을 치웠고 자기 전에도 나가기 전에도 항상 정돈을 했다. 그래야 마음이 차분해져 모든 일이 잘 되는 것 같았다. "너는 원래 정리정돈을 잘하잖아, 그리고 물건을 잘 버리잖아"라고 말했다. 시기 어린 칭찬같이 들렸다.


결혼을 하고 친정에 가면 난 그렇게 청소를 해댔다. 그리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버리거나 치워뒀다. 몸도 성치 않고 아이도 어려 피곤한데 친정에 가면 할 일이 태산이라 잘 안 가게 됐다. 그런 나에게 갑자기 "내가 아는 어떤 아줌마가 집을 모델하우스처럼 꾸며놓고 살거든, 집에 가면 그렇게 깔끔할 수가 없어 그런데 요새 와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대, 자기가 남편을 그동안 많이 힘들게 했구나..."라는 가시 돋친 말을 했다. 기가 막혀서 그 길로 나와버렸다.


항상 음식을 많이 해서 버리는 게 반이고 상하지 않는 물건은 버리지 못해 집에 쌓여만 간다. 그런데도 매일 뭘 더 그렇게 들여온다. 성인이 되었던 어느 날 난 이렇게 생각했다.

"어릴 적 충족되지 않은 엄마의 욕구 표현이구나. 많이 가지고 싶고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일들로 가득 찬 엄마의 삶의 방식인가 보다."라고. 그녀의 결핍되고 외로운 삶의 반증으로 보여 맘 한구석이 아렸다.


입사 후 첫 유럽 출장을 갔을 때 내가 유일하게 사 온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엄마의 핸드백이었다. 내 딴에는 엄마한테 맞게 좀 큼지막한 것을 샀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그것도 작았던지 지금까지 거의 드시는 것을 못 봤다. 언젠가 머지않은 날 그 가방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 다니는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작은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길.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홀가분해져 훨훨 날 수 있을 것 같은 평안한 미소를 장착한 맥시멀리스트에서 미니멀리스트가 된 엄마. 그럼 나도 엄마가 조금 더 편안하겠지.

이전 07화 세 번째 프러포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